이야기 4111

노을 시편/천양희

노을 시편/천양희강 끝에 서서 서쪽으로 드는노을을 봅니다노을을 보는 건 참 오래된 일입니다오래되어도 썩지 않는 것은 하늘입니다하늘이 붉어질 때 두고 간 시들이생각났습니다 피로 써라그러면....생각은새떼처럼 떠오르고나는 아무 것도쓸 수 없어마른풀 몇 개를 분질렀습니다피가 곧 정신이니....노을이 피로 쓴 시 같아노을 두어 편 빌려 머리에서 가슴까지길게 썼습니다 길다고 다 길이겠습니까그때 하늘이 더 붉어졌습니다피로 쓴 것만을사랑하라....내 속으로 노을 뒤편이드나들었습니다쓰기 위해 써버린 많은 글자들 이름들붉게 물듭니다노을을 보는 건 참 오래된 일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사랑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되기도 한다그리곤 살과 뼈를 깍는 고통을 통해서만 발전을 이루는게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는 순간,그는 더더욱 사..

2024.09.20

전어 / 이성복

전어 / 이성복  네 생각나면집 나간 며느리도돌아온다는 가을 전어남해 비토리에서손가락 두 개 포갠 크기의너의 몸 회 뜨는 것을 보았다네 모가지를 비스듬히 자르는 것은조금이라도 버려지는 살이아까워서였다잘린 모가지엔 검은 피가 묻어 있지만내장을 훑어낸 뱃대기는창포묵처럼 투명하였다인적 없는바닷가 모텔에서,입안에 녹아 흐르는 너의 살로피로한 연애의 여흥을 돋우는 것을모가지 잘리고서도너는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서해안 전어잡이 배들----) 가끔은,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사람들을 마주하며 삽니다그중 최고는 제가 유별납니다만...?삐지고, 지날나고,,, 관심을 가지고 깊이 바라보면, 귀하고 빛나는 삶이거늘 ,,,  내가 못보고 지나칠뿐,,,,  아름다운 사치일지도 모른다 이번 추석은 살아남는 것이 참 아름답다는 ..

2024.09.18

어느 날의 커피 / 이해인

어느 날의 커피 / 이해인​어느날혼자 가만히 있다가갑지기 허무해지고아무 말도 할 수 없고​가슴이 터질 것만 같고눈물이 쏟아지는데누군가를 만나고 싶은데만날 사람이 없다​주위에는 항상친구들이 있다고 생각했는데이런날 이런 마음을들어줄 사람을 생각하니​수첩에 적힌 이름과 전화번호를읽어내려가 보아도모두가 아니었다​혼자 바람 맞고 사는 세상거리를 걷다 가슴을 삭이고 마시는 뜨거운 한잔의 커피​아! 삶이란때론 이렇게 외롭구나​

2024.09.16

커피 가는 시간 / 문정희

커피 가는 시간 / 문정희아직도 쓸데없는 것만 사랑하고 있어요가령 노래라든가 그리움 같은 것상처와 빗방울을그리고 가을을 사랑하고 있어요. 어머니아직도 시를 쓰고 있어요밥보다 시커먼 커피를 더 많이 마시고몇 권의 책을 끼고 잠들며직업보다 떠돌기를 더 좋아하고 있어요바람 속에 서 있는 소나무와홀로 가는 별과 사막을미친 폭풍우를 사랑하고 있어요전쟁터나 하수구에 돈이 있다는 것쯤 알긴 하지만그래서 친구 중엔 도회로 떠나하수구에 손을 넣고 허우적대기도 하지만단 한 구절의 성경도단 한 소절의 반야심경도 못 외는 사람들이성자처럼 흰옷을 입고땅 파며 살고 있는 고향 같은 나라를 그리며오늘도 마른 흙을 갈고 있어요. 어머니    아내와 드라이브,,, 사랑이 우리를 살리고, 사랑으로 우리는 이룬다돌아보면 ,마음 아팟던 첫..

2024.09.09

가을엔 이렇게 살게 하소서 / 이해인

가을엔 이렇게 살게 하소서 / 이해인​​가을에는따뜻한 눈물을 배우게 하소서.​내 욕심으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소리 없이 함께 울어줄 수 있는맑고 따뜻한 눈물을 배우게 하소서. 가을에는빈 가슴을 소유하게 하소서.​집착과 구속이라는 돌덩이로우리들 여린 가슴을 짓눌러별 처럼 많은 시간들을 힘들어 하며고통과 번민 속에 지내지 않도록빈 가슴을 소유하게 하소서 가을에는풋풋한 그리움하나 품게 하소서.​우리들 매 순간 살아감이때로는 지치고 힘들어누군가의 어깨가 절실히 필요할 때보이지 않는 따스함으로 다가와어깨를 감싸 안아 줄수 있는풋풋한 그리움하나 품게하소서. 가을에는말 없는 사랑을 하게하소서.​사랑 이라는 말이 범람하지 않아도서로의 눈빛만으로도간절한 사랑을 알아주고 보듬어주며부족함조차도 메..

2024.09.07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며 /유안진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며 /유안진​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우리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도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밤 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열어 보일 수 있고 악의없이 남의얘기를 주고 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걱정되지 않는 친구가….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제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어찌 행복해질 수 있을까?영원이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그가 여성이어도 좋고, 남성이어도 좋다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다만 그의 인품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은근하며 깊고 ..

2024.09.04

잠깐 멈췄다 가야 해 / 류시화

잠깐 멈췄다 가야 해 / 류시화 '잠깐 멈췄다 가야 해.내일은 이 꽃이없을지도 모르거든.'누군가이렇게 적어서 보냈다.내가 답했다.'잠깐 멈췄다 가야 해.내일은 이 꽃 앞에없을지도 모르거든.'   물건도 마음도 형편만큼, 분수만큼이어야 할 것은 사실 자명한 이치이다어쩌면 사람의 마음이야말로 예금 잔액처럼 바닥나지 않도록 조심스레아끼며 지키고, 또 늘려가야 할 무엇인 것 같다  --- 사랑도 예금 잔액처럼 아껴써야  전영애 --

2024.08.31

8월에는 쉼표 하나 찍자 / 전진옥

8월에는 쉼표 하나 찍자 /  전진옥​열심히 달려온 널 위해이쯤에서 쉼표 하나 찍고휴식의 시간을 선물 하자​이를테면너만의 시간을 띄워놓고푸른 감성에 젖어도 보고​자연이 들려주는 이야기풀벌레 소리도 들으며고요한 쉼을 갖는 거지​이모두가오직 널 위한 것이므로"쉼표" 하나 찍어주자 넘어져본 사람은/이준관넘어져 본 사람은 안다.넘어져서 무릎에빨갛게 피 맺혀 본 사람은 안다.땅에는 돌이 박혀 있다고마음에도 돌이 박혀 있다고그 박힌 돌이 넘어지게 한다고.그러나 넘어져 본 사람은 안다.넘어져서 가슴에푸른 멍이 들어 본 사람은 안다.땅에 박힌 돌부리가슴에 박힌 돌부리를붙잡고 일어서야 한다고.그 박힌 돌부리가 일어서게 한다고.  어려움이 있어도 긍정하라비관적인 상황에서도 낙관하라 주어진 많은 순간이 고비마다,,,자신의 ..

2024.08.23

안개 속에 숨다 / 류시화

안개 속에 숨다 / 류시화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나무 뒤에선 인기척과 함께 곧 들키고 말지만안개 속에서는 가까이 있으나그 가까움은 안개에 가려지고멀리 있어도 그 거리는 안개에 채워진다산다는 것은 그러한 것때로 우리는 서로 가까이 있음을견디지 못하고 때로는 멀어져 감을 두려워한다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나무 뒤에선 누구나 고독하고그 고독을 들킬까 굳이 염려하지만안개 속에서는 삶에서 혼자인 것도 여럿인 것도 없다  죽음과 동시에 잊히고 싶지 않다면  읽을 가치가 있는 글을 쓰라.  또는 글로 쓸 가치가 있는 일을 하라     --- 베저민 프랭크린 ---

2024.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