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시 78

매화 앞에서 / 이해인

매화 앞에서 / 이해인 보이지 않기에 더욱 깊은 땅속 어둠 뿌리에서 줄기와 가지 꽃잎에 이르기까지 먼 길을 걸어온 어여뿐 봄이 마침내 여기 앉아 있네 뼛속 깊이 춥다고 신음하며 죽어가는 이가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 하던 희디흰 봄 햇살도 꽃잎속에 접혀있네 해마다 첫 사랑의 애틋함으로 제일 먼저 매화끝에 피어나는 나의 봄 눈속에 묻어 두었던 이별의 슬픔도 문득 새가 되어 날아 오르네 꽃 나무 앞에 서면 갈 곳 없는 바람도 따스하여라 살아갈수록 겨울은 길고 봄이 짧더라도 열심히 살 거란다 그래, 알고 있어 편하게만 살 순 없지 매화도 내게 그렇게 말했단다 눈이 맑은 소꿉동무에게 오늘은 향기나는 편지를 쓸까 매화는 기어이 보드라운 꽃술처럼 숨겨두려던 눈물 한방울 내 가슴에 떨어뜨리네 「 오직 그대 한사람을 위해..

2021.03.09

꽃이 피었다 / 나호열

꽃이 피었다 / 나호열 바라보면 기쁘고도 슬픈 꽃이 있다 아직 피어나지 않아 이름조차 없는 꽃 마음으로 읽고 눈으로 덮어버리는 한 잎의 향기와 빛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향일성 向日性의 시간의 촛대 위에 담쟁이 넝쿨 같은 촛불을 당기는 일 내 앞에서 너울대는 춤추는 얼굴 그 그림자를 오래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이 기쁘고 또 슬프고 슬픔이 터져 혼자서 슬픈사람은 울 곳이 마땅치 않다 지천에 깔린 꽃들은 슬픔을 알고 있다 가을 선운사에서는 세상의 많은 말들이 부질없다 영혼의 씨앗이 뿌려져 꽃 피운 상사화가 있으니까,,,

2020.09.25

그리운 서귀포1 / 노향림

그리운 서귀포1 / 노향림 나는 가난했어요 낡은 지도 한 장 들고 서귀포로 갑니다 맑은 갯벌엔 눈감은 게 껍질들이 붙어 있어요 가는귀 먹은 게들이 남아서 부스럭거립니다 햇빛과 목마름으로 여기까지 버티어온 나는 바다를 앞에 놓고도 건너갈 수가 없어요. 아내의 나라가 보이는 곳까지 가까스로 닿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에 가까스로 닿습니다. 나의 처소는 이끼 낀 흙 담벽이 둘러쳐져 있어요 그리고 한 평 반의 바람 드는 방엔 닿을 수 없는 아내의 바다가 수심에 잠겨 출렁거려요. 그리운 쪽빛 바다 서귀포 십여일의 격리 생활을 정리합니다 매달려 있던 링겔도 빼고,,, 덥수룩한 수염도 밀고, 간만에 화장품도 바르고,,, 집에 가면 뜨거운 물에 씻고, 바닷가에 가고 싶습니다 차가움이 밀려들어오는 바닷바람이 부는 곳으로,,

2020.05.14

꽃들은 경계를 넘어간다 / 노향림

꽃들은 경계를 넘어간다 / 노향림 꽃들이 지면 모두 어디로 가나요. 세상은 아주 작은 것들로 시작한다고 부디 햇빛 아래 소리없이 핀 작디작은 풀꽃들, 녹두알만한 제 생명들을 불꽃처럼 꿰어 달고 하늘에 빗금 그으며 당당히 서서 흔들리네요. 여린 내면이 있다고 차고 맑은 슬픔이 있다고 마음에 환청처럼 들려주어요. 날이 흐리면 눈비 내리면 졸졸졸 그 푸른 심줄 터져 흐르는 소리 꽃잎들이 그만 우수수 떨어져요. 눈물같이 연기같이 사람들처럼 땅에 떨어져 누워요. 꽃 진 자리엔 벌써 시간이 와서 애벌레떼처럼 와글거려요. 꽃들이 지면 모두 어디로 가나요. 무슨 경계를 넘어가나요. 무슨 이름으로 묻히나요. 사람에게 삶의 경계란 아픔을 통해 보이고, 아름다움을 통해 지워지는 것 아닌가 생각된다. 그만큼 사람의 삶의 속도..

2020.05.12

봄이 오면 나는 / 이해인

봄이 오면 나는 / 이해인 봄이 오면 나는 활짝 피어나기 전에 조금씩 고운 기침을 하는 꽃나무들 옆에서 덩달아 봄 앓이를 하고 싶다 살아 있음의 향기를 온몸으로 피워 올리는 꽃나무와 함께 나도 기쁨의 잔기침을 하며 조용히 깨어나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매일 새소리를 듣고 싶다 산에서 바다에서 정원에서 고운 목청 돋우는 새들의 지저귐으로 봄을 제일 먼저 느끼게 되는 나는 바쁘고 힘든 삶의 무게에도 짓눌리지 않고 가볍게 날아다닐 수 있는 자유의 은빛 날개 하나를 내 영혼에 달아주고 싶다 봄아 오면 나는 조금은 들뜨게 되는 마음도 너무 걱정하지 말고 더욱 기쁘고 명랑하게 노래하는 새가 되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유리창을 맑게 닦아 하늘과 나무와 연못이 잘 보이게 하고 또 하나의 창문을 마음에 달고 싶다 같은 ..

2020.04.14

아름다운 신부 / 이향아

아름다운 신부 / 이향아 신부여, 봄 햇살로 짜올린 비단길을 걸어서 오늘은 한 마리 백공작으로 깃을 펴도 좋다 어느 궁성의 장미원인가 향기로운 예감 풍금 켜며 네 곁에 천천히 다가오고 먼 강물 위를 흘러가던 구름도 공손히 허리 굽혀 인사를 하는 오늘 그대는 신부 바람이 지난 밤의 파도 높은 뉴스를 몰고 올지라도 지금 땅 위에서 가장 영롱한 소식은 그대 하늘 아래 가장 충만한 꽃은 그대다 그대가 있어 오늘은 세상이 이리도 눈부시다 오늘은 스스로 격리생활을 합니다 집 주변을 걷고, 꽃을 보며 보냈습니다 많은 이들이 봄을 즐기고 있다는 것은, 봄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마음속에 봄꽃 한송이 피웁니다

2020.04.04

꽃이 있는 세상 / 이향아

꽃이 있는 세상 / 이향아 지상에서 빛나는 이름 하나 누가 물으면 꽃이여, 내 숨결 모두어 낸 한 마디 말로 그것은 '꽃입니다' 고백하겠다 너와 사는 세상이 가슴 벅차다 바람 몹시 불어서 그 사람이 울던 날도 골목마다 집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세상이 이별로 얼어붙던 날도 낮은 언덕 양지쪽 등불을 밝혀 약속한 그 날짜에 피어나던 너 꽃이 있는 세상이 가슴 벅차다 간직했던 내 사랑을 모두 바쳐서 열 손가락 끝마다 불을 켜 달고 나도 어느 날에 꽃이 피련다 무릎 꿇어 핀다면 할미꽃으로 목숨 바쳐 핀다면 동백꽃으로 1년 전 좋은 날 받아둔 꽃을 걸어 말렸습니다 감사함을 간직하고 싶었습니다 교정에는 모련이 활짝 피었습니다 모든 꽃이 항상 피어 있지는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고 말죠,,,! 모든 것은 변한다고 말..

2020.03.24

봄꽃을 보니 / 김시천

봄꽃을 보니 / 김시천 봄꽃을 보니 그리운 사람 더욱 그립습니다 이 봄엔 나도 내 마음 무거운 빗장을 풀고 봄꽃처럼 그리운 가습 맑게 씻어서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서고 싶습니다 조금은 수줍은 듯 어색한 미소도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피었다 지고 싶습니다. 당신을 향하여 기도했을 때, 내 안에 있었다 봄도 당신을 향하여 기도합니다

2020.03.09

꽃 피는 봄엔 / 정예진

꽃 피는 봄엔 / 정예진 봄이 와 온 산천에 꽃이 신 나도록 필 때면 사랑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리라 겨우내 얼었던 가슴을 따뜻한 바람으로 녹이고 겨우내 말랐던 입술을 촉촉한 이슬비로 적셔주리니 사랑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리라 온 몸에 생기가 나고 눈빛마저 촉촉해지니 꽃 피는 봄엔 사랑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리라 봄이 와 온 산천에 꽃이 피어 임에게 바치라 향기는 날리는데 아, 이 봄에 사랑하는 임이 없다면 어이하리 꽃 피는 봄엔 사랑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리라 봄이란 신발을 신고,,,, 꽃구경 가자구요 !

2020.03.03

그리운 것은 꽃으로 핀다 / 김인육

그리운 것은 꽃으로 핀다 / 김인육 졸업한 지 30년도 지난 겨울 고향 땅이 천 리도 넘는 서울 약수역 근처에서 세월의 문을 열고 초등학교 동창회에 간다 영태, 미숙이, 귀숙이, 광수, 덕수, 종란이…… 이름을 알 길 없는 길섶의 풀꽃들 마냥 아른아른 눈에는 익으나 끝내 떠오르지 않는 이름표를 달고 정겹고 환한 들꽃들까지 어울려 피어 있었다 모두, 마흔다 섯의 세월을 껴입은 채 열세 살의 꽃으로만 피어 있었다 그들 중에는 나를 위해 웃던 꽃도 있었고 위하여 내가 웃어야 했던 꽃도 있었다 그러는 사이 봄이 왔고 여름이 갔고 우리들은 민들레 홀씨처럼 흩어져 낯선 곳에서 누군가를 위하여 웃었고 누군가를 위하여 울어야 했다 받아쓰기를 하고 구구단을 외고 술래잡기를 했던 그날의 우리는 삼각함수로도 풀지 못하는 사..

2019.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