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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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주는 시/류 근삶 2021. 8. 31. 21:07
나에게 주는 시/류 근 우산을 접어버리듯 잊기로 한다 밤새 내린 비가 마을의 모든 나무들을 깨우고 간 뒤 과수밭 찔레울 언덕을 넘어오는 우편배달부 자전거 바퀴에 부서져 내리던 햇살처럼 비로소 환하게 잊기로 한다 사랑이라 불러 아름다웠던 날들도 있었다 봄날을 어루만지며 피는 작은 꽃나무처럼 그런 날들은 내게도 오래가지 않았다 사랑한 깊이만큼 사랑의 날들이 오래 머물러주지는 않는 거다 다만 사랑 아닌 것으로 사랑을 견디고자 했던 날들이 아프고 그런 상처들로 모든 추억이 무거워진다 그러므로 이제 잊기로 한다 마지막 술잔을 비우고 일어서는 사람처럼 눈을 뜨고 먼 길을 바라보는 가을 새처럼 한꺼번에 한꺼번에 잊기로 한다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 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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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우체국 / 안도현삶 2021. 8. 29. 21:27
바닷가 우체국 / 안도현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 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었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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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가기전에 다시 찿은 무량사,,,!삶 2020. 11. 14. 20:31
그대 그리운 날이 있습니다. / 김영주 불현 듯 잊었던 기억들이 마음 한구석 싹이 트고 어쩌지 못하는 아픈 눈물이 흐르는 그대 그리운 날이 있습니다 처음으로 돌아가 하나하나 기억 해내며 간절한 마음들을 꺼내고 싶은 그대 그리운 날이 있습니다 그대 만남들이 추억이라는 기억으로 남아 들추어 낼 수 없어 아픈 눈물 떨어 버리고 마는 그대 그리운 날이 있습니다 보고 싶지만 가슴 저리도록 왠, 종일 생각나지만 그럴 수 없어 참아야 하는 안타까운 그대 그리운 날이 있습니다. 올갱이 해장국으로 점심, 벌써 지난주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가을여행은 내가 멈추고 싶으면 멈추고, 바라보며, 멍 때리고 싶은면 할 수 있어야지 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의 시간을 그리하지 못했고 우리의 삶도 내 맘대로 멈춰보지 못했는지 모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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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참 좋다 / 김재덕산 2020. 11. 12. 04:00
가을이 참 좋다 / 김재덕 갈바람이 열정을 식혀주고 코스모스 허수아비 덩실거리는 춤에 잎새의 가슴이 덩달아 붉어지려는 가을이 참 좋다 쪽빛 하늘이 황금 물결에 웃음 짓고 다람쥐 볼때기의 행복한 고민으로 또 다른 미래가 열릴 것 같은 가을이 참 좋다 아직은 녹음 짙은 산등성이에 옹기종기 모인 뭉게구름 수다가 솔깃한 태양이 사랑질하는 저녁놀의 가을이 참 좋다 오색으로 물들어 알콩달콩 속삭이다 황망을 안, 빈 가슴 바스락거릴지라도 뜨거웠던 만큼 하얀 세상을 동경하는 가을이 참 좋다. 새벽에 먼 길을 떠납니다 낙엽이 진 자작나무숲이 그리워졌습니다 홀가분하게 옷을 벗은 곳에서 저도 버리고 오겠습니다 가진것도, 지고 있는 것도, 가지려고 움켜진것도, 너무 무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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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 / 양광모삶 2020. 11. 9. 21:51
가을 편지 / 양광모 9월과 11월 사이에 당신이 있네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천진한 웃움 지으며 종일토록 거니는 흰 구름 속에 아직은 녹색이 창창한 나뭇잎 사이 저 홀로 먼저 얼굴 붉어진 단풍잎 속에 이윽고 인적 끊긴 공원 벤치 위 맑은 눈물처럼 떨어져 내리는 마른 낙엽 속에 잘 찾아오시라 새벽 창가에 밝혀 놓은 작은 촛불의 파르르 떨리는 불꽃 그림자 속에 아침이면 어느 순간에나 문득 찾아와 터질 듯 가슴 한껏 부풀려 놓으며 살랑 살랑거리는 바람의 속삭임 속에 9월과 11월 사이에 언제나 가을 같은 당신이 있네 언제나 당신 같은 가을이 있네 신이시여, 이 여인의 숨결 멈출 때까지 나 10월에 살게 하소서. 모교의 가을입니다 코로나19로 교정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몇 장? 초딩3년 시절인가 심은 은행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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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의 아름다움으로 달려가는 개심사산 2020. 11. 4. 22:22
가을에는 / 최영미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여기부터는 지난 새벽에 다녀온 사진입니다 아무도 없는 길을 오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