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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봉 소나무

풍경 소리 / 이태수 풍경 소리가 귓전을 두드린다 정처 없이 길을 가다가 듣는 이 소리는 비몽사몽, 나를 흔들어 깨우는 손길 같다 ​ 가까이 끌어당길수록 아물거리지만 잊었던 노래의 몇 소절처럼 그윽하다 ​ 저녁 한때의 마을과 멀어지는 외딴길 언저리, 어둠살에 묻히는 소나무 등걸에 기대선다 낮달도 서산마루를 막 넘어가고 별들이 흩어져 앉는 동안 마냥 그대로 붙박인다 갈 길도 가야 할 길도 아예 다 내려놓고 싶다 ​ 여전히 어둠을 흔드는 풍경 소리, 마음을 안으로, 안으로 들여보낸다 안 보이는 어떤 부드럽고 커다란 손이 검은 구름 사이로 어른거린다 마을의 불빛은 왠지 점점 더 멀어져 보인다 ​​ 시집 문학세계사. 20 오르는 이들의 거친 숨소리가 구름으로 걸린듯,,,,! 서로 같은 산을 올라도, 생각은 각기..

2023.06.26

동행

풀잎 스친 바람에도 행복하라/ 이채 정직하면 손해 보고 착하면 무시당하는 것이 세상인심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정직하라 뿌린다고 다 열매가 아니듯 열심히 산다고 반드시 잘 사는 것도 아닐 테니 이 또한 세상살이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감사하라 사랑은 흔해도 진실은 드물고 사람은 많아도 가슴이 없을 때 산다는 건 얼마나 고독한 일인가 그럼에도 사랑하라 살아온 날은 고단하고 살아갈 날은 아득해도 사람아, 그럼에도 사람아 풀잎 스친 바람에도 행복하라 40년 전에는 조금은 작아 보였던 나무 입니다 모르고 지났던 행복이 생각납니다 내가 행복할 때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할 때,,,, 더욱 행복하답니다 길 위에서 느끼는 기쁨도, 추억도,,,, 삶에서 가장 큰 선물입니다

2023.06.25

고사목 / 이성부

고사목 / 이성부 내가 걷는 백두대간 18 내 그리움 야윌 대로 야위어서 뼈로 남은 나무가 밤마다 조금씩 자라고 있음을 나는 보았다 밤마다 조금씩 손짓하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한 오십년 또는 오백년 노래로 살이 쪄 잘 살다가 어느날 하루아침 불벼락 맞았는지 저절로 키가 커 무너지고 말았는지 먼 데 산들 데불고 흥청망청 저를 다 써버리고 말았는지 앙상하구나 그래도 사랑은 살아남아 하늘을 찔러 뼈다귀는 뼈다귀대로 사이좋게 늘어서서 내 간절함 이토록 벌거벗어 빛남이여 지리산에 오를 때면, 언제나 시리도록 푸르던 빛으로 반겨주던 나무들이 고사목이 되었습니다 친구와 말 없이 마시는 차 한잔에도 느낌이 있듯이 우울한 시간에 찿는 친구의 느낌처럼 알 수 있습니다 진한 색의 강한 인상은 사라졌어도,,, 은은하게 한 백..

2023.06.23

수국을 보며 / 이해인

수국을 보며 / 이해인 기도가 잘 안 되는 여름 오후 수국이 가득한 꽃밭에서 더위를 식히네 꽃잎마다 하늘이 보이고 구름이 흐르고 잎새마다 물 흐르는 소리 각박한 세상에도 서로 가까이 손 내밀며 원을 이루어 하나 되는 꽃 혼자서 여름을 앓던 내 안에도 오늘은 푸르디 푸른 한 다발의 희망이 피네 수국처럼 둥근 웃음 내 이웃들의 웃음이 꽃무더기로 쏟아지네 비가 내리면, 대지에 생명력을 부어서 좋고,,, 해가 비추며 개이면 포송해서 좋은 날 입니다 단오 아침, 행복하십시요

2023.06.22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 이원규 ​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시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 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유장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 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려거든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은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 그래도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 진실로 진실..

2023.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