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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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선/박노해삶 2020. 12. 13. 09:44
한계선/박노해 옳은 일을 하다가 한계에 부딪혀 더는 나아갈 수 없다 돌아서고 싶을 때 고개들어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라. 여기서 돌아서면 앞으로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너는 도망치게 되리라. 여기까지가 내 한계라고 스스로 그어버린 그 한계선이 평생 너의 한계가 되고 말리라. 옳은 일을 하다가 한계에 부딪혀 그만 금을 긋고 돌아서고 싶을 때 묵묵히 황무지를 갈아가는 일소처럼 꾸역꾸역 너의 지경을 넓혀가라.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하루의 시간, 우리는 현재(Present)를 선물(Present) 이라고 부릅니다 선물같은 나의 하루를 행복이 반짝이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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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길 / 도종환산 2020. 6. 15. 21:54
아름다운 길 / 도종환 너는 내게 아름다운 길로 가자 했다 너와 함께 간 그 길에 꽃이 피고 단풍 들고 길 옆으로 영롱한 음표들을 던지며 개울물이 흘렀지만 겨울이 되자 그 길도 걸음을 뗄 수 없는 빙판으로 변했다 너는 내게 끝없이 넒은 벌판을 보여달라 했다 네 손을 잡고 찾아간 들에는 온갖 풀들이 손을 흔들었고 우리 몸 구석구석은 푸른 물감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빗줄기가 몰아치자 몸을 피할 곳이 없었다 내 팔을 잡고 놓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넘어질 때 너도 따라 쓰러졌고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세찬 바람 불어올 때마다 너도 그 바람에 꼼짝 못하고 시달려야 했다 밤새 눈이 내리고 날이 밝아도 눈보라 그치지 않는 아침 너와 함께 눈 쌓인 언덕을 오른다 빙판 없는 길이 어디 있겠는가 사랑하며 함께 꽃잎 같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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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편지/ 김현태삶 2020. 1. 16. 06:12
뜨거운 편지/ 김현태 그대에게 편지를 씁니다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그대 마음 얻을까, 고민하다가 연습장 한 권을 다 써버렸습니다 이렇게 침이 마르도록 고된 작업은 처음입니다 내 크나큰 사랑을 표현하기에는 글이란 것이 턱없이 못 미치는 것 같습니다 지금 부엌에서 보리차가 끓고 있습니다 보리차가 주전자 뚜껑을 들었다, 놨다 합니다 문틈으로 들어 온 보리차 냄새가 편지지 위에서 만년필을 흔들어 댑니다 사랑합니다, 란 글자 결국 이 한 글자 쓰려고 보리차는 뜨거움을 참았나 봅니다 그대와 나의 관계는 내 삶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 칼린 지브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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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우체국/ 안도현삶 2019. 12. 19. 20:50
바닷가 우체국/ 안도현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 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었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 시절에 그랬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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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 정 희삶 2019. 12. 12. 13:47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 정 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은 손 하나 오고 있거니 … 제4시집 《이 시대의 아벨》(문학과 지성사, 1983) 기적이 일어나라 간절한 나의 마음이 담긴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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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월도 풍경 / 한휘준삶 2019. 10. 11. 08:24
간월도 풍경 / 한휘준 천수만 간월도에서 매운 어리굴젓이랑 광어회를 맛있게 먹다가 그녀 생각에 핑 눈물이 났다 아니야- 울며 겨자 먹기라 하였던가 코끝이 찡하고 눈물이 나는 것은 매운 겨자 탓이라 하였었지 그대 목이 메인 그리움에 우럭 매운탕을 먹다가 끝내 , 목구멍에 가시가 걸렸다 그래 , 다가오다 먼발치에서 섬이 되어 버린 삼킬 수 없는 가시 같은 목 메인 그리움 흔들리는 파도에 씻겨 늘 푸른 울음 우는 너의 목소리였지 나는 처음 먹는 우럭 매운탕이 별로 내키지 않는다고 그만 말하고 말았지 바람이 먼 곳에서 불어왔다 파도가, 물결이 걸작을 만들어 낸다 모래언덕에 가을이 왔다 바람에 흩어지고, 모이는 사구 언덕 쌓이고, 흘러 내리면서 긴 역사를 만들어내는 현장, 간월암을 바라보며 저 앞에 느티나무가 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