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릉진달래
-
남겨두고 싶은 순간 / 박성우삶 2022. 4. 11. 22:48
남겨두고 싶은 순간 / 박성우 시외버스 시간표가 붙어있는 낡은 슈퍼마켓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오래된 살구나무를 두고 있는 작고 예쁜 우체국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유난 떨며 내세울 만한 게 아니어서 유별나게 더 좋은 소소한 풍경, 슈퍼마켓과 우체국을 끼고 있는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 아 저기 초승달 옆에 개밥바라기! 집에 거의 다 닿았을 때쯤에야 초저녁 버스정류장에 쇼핑백을 두고 왔다는 걸 알았다 돌아가 볼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으나, 나는 곧 체념했다 우연히 통화가 된 형에게 혹시 모르니, 그 정류장에 좀 들러 달라 부탁한 건, 다음날 오후였다 놀랍게도 형은 쇼핑백을 들고 왔다 버스정류장 의자에 있었다는 쇼핑백, 쇼핑백에 들어있던 물건도 그대로였다 오래 남겨두고 싶은 순간이었다 용봉산..
-
진달래 / 홍수희산 2022. 4. 10. 08:46
진달래 / 홍수희 그 땐 참, 내 마음이 저리 붉었습니다 당신이 지나치며 투욱, 떨어뜨린 불씨 하나가 내 영혼 가파른 벼랑 위로 잘도 활활 타들어 올랐습니다 타들어 오신 길 마저 닿을 듯 아슬한 그리움 문득 출렁이는 아픔 되어도 다시는 그 후 지나치며 투욱, 불씨 하나 떨어뜨려 주지 않으셔도 그 땐 참, 이별도 사랑이라 저리 붉었습니다 햇살 좋은 날, 고향 뒷산 용봉산에 올랐습니다 암릉 진달래가 피었나 보았더니 다 피었습니다 ㅎㅎ 모진 겨울과 바람을 이기고 금년에도 멋진 꽃을 피웟습니다 모양이야 어려 종류이지만, 그 승리에 깊은 감동을 느낌니다
-
홀로 피는 꽃은 없다/남정림산 2021. 1. 6. 21:50
홀로 피는 꽃은 없다/남정림 땅끝 오지마을 바위 틈새에 외롭게 핀 꽃이라 할지라도 인적도 증발해 버린 외진 사막에 혼자서 핀 꽃이라 할지라도 홀로 피는 꽃은 없다. 수시로 찾아와 어깨 두드리는 햇살, 수건처럼 펄럭이며 땀 닦아주는 바람, 수고의 등 내밀어 바쳐주는 찰흙이 우주의 자궁에서 깨알처럼 잉태되어 꽃가루, 꽃향기, 꽃받침으로 태어난다 지구별 안에는 별가루 하나 홀로 날리는 일 없고 먼지꽃 하나 홀로 피는 법 없다. 홀로 피는 꽃은 없다. 공짜 점심도, 대가 없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오늘도, 소복이 내린 눈을 밟으니 소리가 납니다 힌 눈 위에 복잡한 마음 덮습니다
-
봄이 오면 나는 / 이해인산 2020. 4. 14. 04:40
봄이 오면 나는 / 이해인 봄이 오면 나는 활짝 피어나기 전에 조금씩 고운 기침을 하는 꽃나무들 옆에서 덩달아 봄 앓이를 하고 싶다 살아 있음의 향기를 온몸으로 피워 올리는 꽃나무와 함께 나도 기쁨의 잔기침을 하며 조용히 깨어나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매일 새소리를 듣고 싶다 산에서 바다에서 정원에서 고운 목청 돋우는 새들의 지저귐으로 봄을 제일 먼저 느끼게 되는 나는 바쁘고 힘든 삶의 무게에도 짓눌리지 않고 가볍게 날아다닐 수 있는 자유의 은빛 날개 하나를 내 영혼에 달아주고 싶다 봄아 오면 나는 조금은 들뜨게 되는 마음도 너무 걱정하지 말고 더욱 기쁘고 명랑하게 노래하는 새가 되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유리창을 맑게 닦아 하늘과 나무와 연못이 잘 보이게 하고 또 하나의 창문을 마음에 달고 싶다 같은 ..
-
4.3을 지납니다삶 2020. 4. 3. 22:00
매화꽃이 보는 곳을 보라/이산하 나도 가끔은 매화처럼 살고 싶었다 매화꽃이 보는 곳을 보고 매화 향기 가는 곳을 가고 싶었다 다른 꽃들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필 때 매화처럼 땅을 내려다보며 피고 싶었다 눈보라 속 잎보다 먼저 꽃 피고 싶었고 어둠 속 매화 향기에 취해, 나도 그 암향을 귀로 듣고 싶었다 매화나무처럼 열매 속에 독을 넣어 새들이 함부로 씨를 퍼뜨리지 못하거나 매서운 추위 없이 곧바로 새 가지에 열매 맺고 싶지도 않았다, 나도 가끔은 매화꽃처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땅의 생채기에 단청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매화꽃이 보는 곳을 보다 보면 매화 향기 가는 곳을 가다 보면 나는 이미 하늘을 올려다보며 허공의 바탕에 단청을 하고 있었다 좌우의 치우침이 아니라 아품이 있는 날, 4.3 이 땅에서 열심히..
-
여행 / 정호승산 2019. 4. 27. 11:28
여행 / 정호승 사람이 여행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뿐이다 아직도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오지뿐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떠나라 떠나서 돌아오지 마라 설산의 창공을 나는 독수리들이 유유히 나의 심장을 쪼아 먹을 때까지 쪼아 먹힌 나의 심장이 먼지가 되어 바람에 흩날릴 때까지 돌아오지 마라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람의 마음의 설산뿐이다. 모처럼 햇볕이 좋은 날입니다 돈을 지불하지 않고 얻는 것은 더욱 소중한가 봅니다 싱그러운 바람, 하늘, 햇볕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