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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채꽃밭을 지나며 / 고정희삶 2023. 4. 13. 06:59
유채꽃밭을 지나며 / 고정희
어머니, 이제 더는 말이 없으신
어머니
당신의 시신을 뒷동산 솔밭에 묻고
제 가슴에도 비로소 둥긋한 봉분 한구 솟아버린 채
서른아홉의 짐을 끌고 고향을 하직하던 날
소리나지 않게 울며
대문 밖에 서 계시는 어머니와 손 흔들던 날
저산리 모퉁이를 돌아서던 제 시야에
오늘처럼
눈부시게 흔들리는 유채꽃밭을 보았습니다
백야리를 지나고 배드레재 지날 동안
저를 따라오던 유채꽃밭에는
호랑나비 노랑나비 훨훨 날아들어
이 세상의 적멸을 쓰러뜨리며
찬란한 화관을 들어올리고 있었습니다
제발 가슴속의 봉분을 버려라
찾아오면 떠나갈 때가 있고
머물렀으면 일어설 때가 있나니
사람은 순서가 다를 뿐이다
유채꽃밭 속으로 걸어가던 어머니
그날처럼 오늘도
산천솔기마다 유채꽃 흐드러져
무겁고 막막한 슬픔을 쓰러뜨리며
이 세상의 적멸 끝으로
아름다운 하늘자락 흘러가고 있습니다
따스한 봄햇살 따라가고 있습니다
- 고정희,『지리산의 봄』(문학과지성사, 1987)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의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가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 생에 감사해, 김혜자 중에서 --
오늘도 최고로 멋진 삶 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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