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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살아낸다는 건 / 황동규

삶을 살아낸다는 건 / 황동규 다 왔다. 동녘 하늘이 자잔히 잿빛으로 바뀌기 시작한 아파트 동과 동 사이로 마지막 잎들이 지고 있다, 허투루루. 바람이 지나가다 말고 투덜거린다. 엘리베이터 같이 쓰는 이웃이 걸음 멈추고 같이 투덜대다 말고 인사를 한다. 조그만 인사, 서로가 살갑다. 얇은 서리 가운 입던 꽃들 사라지고 땅에 꽂아논 철사 같은 장미 줄기들 사이로 낙엽은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밟히면 먼저 떨어진 것일수록 소리가 엷어진다. 아직 햇빛이 닿아 있는 피라칸사 열매는 더 붉어지고 하나하나 눈인사하듯 똑똑해졌다. 더 똑똑해지면 사라지리라. 사라지리라, 사라지리라 이 가을의 모든 것이, 시각을 떠나 청각에서 걸러지며. 두터운 잎을 두르고 있던 나무 몇이 가랑가랑 마른기침 소리로 나타나 속에 감추었던 가지..

2023.12.27

사랑의 이율배반 / 이정하

사랑의 이율배반 / 이정하 그대여 손을 흔들지 마라.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떠나는 사람은 아무 때나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겠지만 남아 있는 사람은 무언가 무작정 기다려야만 하는가. 기약도 없이 떠나려면 손을 흔들지 마라. 사는 곳에 계속 폭설이 내렸습니다 오늘은 푹한 날씨에 길도 좀 녹아내립니다 푸른 색감이 그립습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몇 년만에 맞이합니다 전쟁,질병, 가난, 기아 등 등으로 고통받는 이웃이 없기를 소망합니다 재벌들도 소천하시면 한 줌의 재가 되어 가는 것을 봅니다 생명이 살아있는 동안에 ,,, 영화 레미제라불의 명대사를 되뇌어 봅니다 인생은 소유가 아니라 나누어 주는 것 입니다

2023.12.25

겨울바다 / 이해인

겨울바다 / 이해인 내 쓸모없는 생각들이 모두 겨울 바닷속으로 침몰해 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 누구도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일 때 바다를 본다 ​ 누구도 사랑하기 어려운 마음일 때 기도가 되지 않는 답답한 때 ​ 아무도 이해 못 받는 혼자임을 느낄 때 나는 바다를 본다. ​ 참 아름다운 바다 빛 하늘빛 하느님의 빛 ​ 그 푸르디푸른 빛을 보면 누군가에게 꼭 편지를 쓰고 싶다 ​ 사랑이 길게 물 흐르는 바다에 나는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정합니다 어느 순간에는 가장 흥청망청 쓰는 것이기도 합니다 태양이 뜨기 전에 가장 어둡고, 빛이 없듯이,,,, 동지 절기를 지나면서, 태양은 다시 양기를 품기 시작한답니다 지루할 틈이 없는 삶을 소망합니다

2023.12.22

우리가 눈발이라면 / 안도현

우리가 눈발이라면 / 안도현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 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시간 참 빠릅니다 미안하다고,,,, 사랑하다고 ,,,, 감사하다고,,, 아직 말하지 못했는데, 연말로 달려 갑니다 내가 가진 것만 소중히 생각했던 사람, 나 좀 욕심이 작아져 가면서 살아가는 내가 되기를 ,,,

2023.12.17

겨울 사랑 / 박노해

겨울 사랑 / 박노해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에게 겨울이 없다면 무엇으로 따뜻한 포옹이 가능하겠느냐 무엇으로 우리 서로 깊어질 수 있겠느냐 ​ 이 추운 떨림이 없다면 꽃은 무엇으로 피어나고 무슨 기운으로 향기를 낼 수 있겠느냐 나 언 눈 뜨고 그대를 기다릴 수 있겠느냐 ​ 눈보라 치는 겨울밤이 없다면 추워 떠는 자의 시린 마음을 무엇으로 헤아리고 내 언 몸을 녹이는 몇 평의 따뜻한 방을 고마워하고 자기를 벗어버린 희망 하나 커 나올 수 있겠느냐 ​ 아아 겨울이 온다 추운 겨울이 온다 떨리는 겨울 사랑이 온다 바다는 자신을 그대로 내보인다 우리의 인생도 똑같다 필요 이상으로 숨길 필요도, 꾸밀 필요도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 나 자신을 보이며 나아가면 된다 ---- 이주영, 모든 삶은 흐른다 중에서 --- 눈이..

2023.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