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보리밭 17

그리하여 나는 슬픔을 잊었다 / 김금란

그리하여 나는 슬픔을 잊었다 / 김금란 당신의 이름이 사라졌다 이른 봄꽃이 꽃망울을 피웠지만 서랍을 가득 채운 약봉지들만 당신을 기억할 뿐 무릉도원면 아랫골 길 163-12에는 당신의 이름으로 된 우편물 하나 더는 오지 않았다 사람을 잊는 것도 이름을 잊는 것도 계절을 보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한때 당신의 이름의 한 획이었던 활자들이 가끔 꽃샘추위처럼 내 머리속을 찌르고 지나갈 뿐 죽을 것처럼 오열했던 순간들은 땅에 닿은 힌 눈보다 빨리 사라졌다 나는 다시 울음보다 웃음이 많아졌고 틈만 나면 남해 여행 책자를 뒤적이고 있었다 세상에 남은 것은 그 누구의 슬픔도 그 누구의 이름도 아니었다 당신을 영 잊은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는 말은 더 이상 믿지 않기로 했다 흙을 밟고 걷는 것이 특..

2019.05.21

꽃다발을 말리면서 / 이향아

꽃다발을 말리면서 / 이향아 누가 내게 이와 같은 슬픔까지 알게 하는가 꽃이 피는 아픔도 예사가 아니거늘 저 순일한 목숨의 송이 송이 붉은 울음을 꺾어다가 하필이면 내 손에서 시들게 하는가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것처럼 꽃은 매달려서 절정을 모으고 영원히 사는 길을 맨발로 걸어서 이렇게 순하게 못 박히나니 다만 죽어서야 온전히 내게로 돌아오는 꽃이여 너를 안아 올리기에는 내 손이 너무 검게 너무 흉하게 여위었구나 황홀한 순간의 갈채는 지나가고 이제 남은 것은 빈혈의 꽃과 무심한 벽과 굳게 다문 우리들의 천 마디 말뿐 죽어가는 꽃을 거꾸로 매다노라면 물구나무서서 솟구치는 내 피의 열기, 내 피의 노여움, 네 피의 통곡, 꽃을 말린다 입술을 깨물고 검게 탄 내 피를 허공에 바랜다 비 내리는 날, 보리밭에서,..

2018.04.23

고창 청보리밭 미리 가봅니다

청보리밭축제가 4월 21일부터 5월 13일까지 개최됩니다 가족들과 잠시 들렀습니다 매년 인파 속에서 즐겼지만, 금년에는 시기를 봐서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는 시절에 오렵니다 상황은, 보리는 아직 이삭이 나오지 않했습니다 키도 작아보였습니다 추위에 덜 자란 곳도 있지만, 초록의 생명력은 가득했습니다 어제 내린 비를 맞으면 훌쩍 클 것으로 봅니다 등너머 유채밭은 개화가 시작되었구요 축제가 기대됩니다 어느 날 오후 풍경 / 윤동주 창가에 햇살이 깊숙이 파고드는 오후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창 밖을 바라본다. 하늘에 구름 한 점 그림처럼 떠 있다 세월이 어찌나 빠르게 흐르는지 살아가면 갈수록 손에 잡히는 것보다 놓아주어야 하는 것들이 많다 한가로운 오후 마음의 여유로움보다 삶을 살아온 만큼 외로움이 몰려와 눈물이..

2018.04.15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정일근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먼 바다로 나가 하루 종일 고래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사람의 사랑이 한 마리 고래라는 것을 망망대해에서 검은 일 획 그으며 반짝 나타났다 빠르게 사라지는 고래는 첫사랑처럼 환호하며 찾아왔다 이뤄지지 못할 사랑처럼 아프게 사라진다 생의 엔진을 모두 끄고 흔들리는 파도 따라 함께 흔들리며 뜨거운 햇살 뜨거운 바다 위에서 떠나간 고래를 다시 기다리는 일은 그 긴 골목길 마지막 외등 한 발자국 물러난 캄캄한 어둠 속에 서서 너를 기다렸던 일 그때 나는 얼마나 너를 열망했던가 온몸이 귀가 되어 너의 구둣발 소리 기다렸듯 팽팽한 수평선 걸어 내게로 돌아올 그 소리 다시 기다리는 일인지 모른다 오늘도 고래는 돌아오지 않았다 바다에서부터 푸른 어둠이 내리고 떠나온 점등인의 별로 돌아가며 이제 ..

2017.06.14

가을에 아름다운 것들 / 정유찬

가을에 아름다운 것들 / 정유찬 가을엔 너른 들판을 가로 질러 노을지는 곳으로 어둠이 오기 전까지 천천히 걸어 보리라 아무도 오지 않는 그늘진 구석 벤치에 어둠이 오고 가로등이 켜지면 그리움과 서러움이 노랗게 밀려 오기도 하고 단풍이 산기슭을 물들이면 붉어진 가슴은 쿵쿵 소리를 내며 고독 같은 설렘이 번지겠지 아, 가을이여! 낙엽이 쏟아지고 철새가 떠나며 슬픈 허전함이 가득한 계절일지라도 네게서 묻어오는 느낌은 온통 아름다운 것들뿐이네 나에게 오랜 기다림을 안고 그대 가슴에 안겨 파아란 눈으로 한없이 울고 싶어라!

2016.04.26

방문객 / 정현종

방문객 /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것이다.-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내나면 필경 환대가 될것이다. 5월에는 행복이라는 손님이 오시길 소망합니다 기다림이 있는 삶이길 또한 소망합니다 문득 그리움도 있고 여유가 있어 잠시 쉬어가도 좋은 그런 날이 많았으면 합니다 그리운 사람이 있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빙그레 그의 온기를 떠올리며 웃을 수 있었으면 더욱 행복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도, 나를 떠올리는 5월이길 소망합니다

2015.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