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여행 52

너를 사랑한다 /강은교

너를 사랑한다 /강은교 너를 사랑한다그땐 몰랐다.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그땐 그걸 몰랐다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저 신발의 속가슴을 보게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그땐 몰랐다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꽃 속에 꽃이 있는 줄을 몰랐다일몰의 새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몰랐다.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

2025.03.12

산 / 법정

산 / 법정산을 건성으로 바라보고 있으면산은 그저 산 일뿐이다그러나 마음을 활짝 열고산을 진정으로 바라보면우리 자신도 문득 산이 된다. 내가 정신 없이 분주하게 살 때에는저만치서 산이 나를 보고 있지만내마음 그윽하게 한가 할 때에는내가 산을 바라본다  아래쪽에서 올려다볼 때 엘리트의 오만은 짜증나지 않을 수 없다 .  누구도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서고 싶지 않다그러나 능력주의 신앙은 그들이 입은 상처에 굴욕까지 보탠다. 자신의 곤경은 자신 탓이라는 말, 하면 된다 라는 양날의 검이다 --- 마이크 샌덜, 공정허다는 착각 에서 --

2024.12.25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며 /유안진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며 /유안진​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우리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도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밤 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열어 보일 수 있고 악의없이 남의얘기를 주고 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걱정되지 않는 친구가….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제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어찌 행복해질 수 있을까?영원이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그가 여성이어도 좋고, 남성이어도 좋다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다만 그의 인품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은근하며 깊고 ..

2024.09.04

비 오는 날 / 마 종 기

비 오는 날 / 마 종 기 구름이 구름을 만나면 큰소리를 내듯이 ‘아’ 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치면서 그렇게 만나고 싶다 당신을 구름이 구름을 갑자기 만날 때 환한 불을 일시에 켜듯이 나도 당신을 만나서 잃어버린 내 길을 찾고 싶다 비가 부르는 노래의 높고 낮음을 나는 같이 따라 부를 수가 없지만 비는 비끼리 만나야 서로 젖는다고 당신은 눈부시게 내게 알려준다. 겨울비가 내리는 날, 커피 한 잔 들고 앉았습니다 이리저리 맞이하는 시간들이 분주하네요 여행이란 것을 간지가 참 오래된 느낌입니다 일상이,,,, 가족의 병환으로,,,, 붙박이가 되었나 합니다 국면 전환이 필요한 싯점입니다 진정한 여행의 발견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푸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찿아서 중에서)

2024.01.20

구부러진 길 / 이준관

구부러진 길 / 이준관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 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그날, 비는 많이 내리고,,, 낯설지는 않했지요 나에겐 당신이 있다는 것이 참 고마웠습니다 나의 쉼이..

2023.09.18

추억 / 나태주

추억 / 나태주 어디라 없이 문득 길 떠나고픈 마음이 있다 누구라 없이 울컥 만나고픈 얼굴이 있다 반드시 까닭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분명히 할 말이 있었던 것은 더욱 아니다 푸른 풀빛이 자라 가슴속에 붉은 꽃들이 피어서 간절히 머리 조아려 그걸 한사코 보여주고 싶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지난 주말, 제주 탑동광장의 노을을 떠올려 봅니다 일상을 벗어나, 함께 하는 꿈을 이야기 했던 시간 입니다 우주는 광활하다, 그러나 무한하지는 않다. 내가 관측한 대상 중 무한에 가장 가까운 것은 희망이다 -- 천체 물리학자 하킴 올루세이 --

2023.09.17

친구에게 / 정호승

친구에게 / 정호승 젖은 우산을 접듯 그렇게 나를 접지 말아줘 비 오는 날 밤늦게 집으로 돌아와 뚝뚝 물방울이 떨어지는 우산을 그대로 접으면 젖은 우산이 밤새워 불을 지피느라 그 얼마나 춥고 외롭겠니 젖은 우산을 활짝 펴 마당 한가운데 펼쳐놓듯 친구여 나를 활짝 펴 그대 안에 갖다놓아줘 풀 향기를 맡으며 햇살에 온몸이 말릴 때까지 그대 안에 그렇게 먼 곳에서 잘 있다는 소식이 오니 감사합니다 그냥 붕 떠있는 느낌, 이것도,,, 추억이 되는 건가!

2023.06.05

그리운 바다 성산포 2 / 이생진

그리운 바다 성산포 2 / 이생진 일출봉에 올라 해를 본다 아무 생각 없이 해를 본다 해도 그렇게 날 보다가 바다에 눕는다 일출봉에서 해를 보고 나니 달이 오른다 달도 그렇게 날 보더니 바다에 눕는다 해도 달도 바다에 눕고 나니 밤이 된다 하는 수 없이 나도 바다에 누워서 밤이 되어 버린다 날짐승도 혼자 살면 외로운 것 바다도 혼자 살기 싫어서 퍽퍽 넘어지며 운다 큰 산이 밤이 싫어 산짐승을 불러오듯 넓은 바다도 밤이 싫어 이부자리를 차내 버리고 사슴이 산 속으로 산 속으로 밤을 피해 가듯 넓은 바다도 물 속으로 밤을 피해 간다 성산포에서는 그 풍요 속에서도 갈증이 인다. 바다 한 가운데 풍덩 생명을 빠뜨릴 순 있어도 한 모금 물을 건질 수는 없다 성산포에서는 그릇에 담을 수 없는 바다가 사방에 흩어져 ..

2023.02.11

천지연에 폭설 내리던 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 정희성 어느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긴 터널처럼 연말이 지나갑니다 유난히 힘든 느낌입니다 묵지근한 어깨, 조금은 스크래치 난 마음결,,,,, 자존감도 채우고, 참으며 버틴 나를 위하여 어디든 떠나봐야겠습니다

2023.01.05

겨울 폭포 / 이산하

겨울 폭포 / 이산하 ​ 나이에 맞게 살 수 없다거나 시대와 불화를 일으킬 때마다 난 얼어붙은 겨울 폭포를 찾는다 한때 안팍의 경계를 지웠던 이 폭포는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여전히 공포에 떨고 있다 자신의 모든 틈을 완벽하게 폐쇄시켜 폭포 바닥에 깔린 돌들의 외침이며 사방으로 튀어나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물방울들의 그림자며 지금도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저 헛것들의 슬픔까지 폭포는 물의 마디마디 꺾어가며 자신을 허공으로 던진다 그러나 던져지면서도 폭포는 왜 정점에서 자신을 꺾는지 자신을 꺾어 왜 단숨에 비약하는지 물이 바닥을 치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내 눈과 내 귀의 모호한 결탁임을 그것이 마침내 공포에 떠는 내 헛것의 정체임을 불현듯 깨닫는다 폭포는 물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2022.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