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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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울린다 / 진은영삶 2022. 11. 14. 06:59
어울린다 / 진은영 너에게는 피에 젖은 오후가 어울린다 죽은 나무 트럼펫이 바람에 황금빛 소음을 불어댄다 너에게는 이런 희망이 어울린다 식초에 담가둔 흰 달걀들처럼 부서지는 희망이 너에게는 2월이 잘 어울린다 하루나 이틀쯤 모라자는 슬픔이 너에게는 토요일이 잘 어울린다 부서진 벤치에 앉아 누군가 내내 기다리던 너에게는 촛불 앞에서 흔들리는 흰 얼굴이 어울린다 어둠과 빛을 아는 인어의 얼굴이 나는 조용한 개들과 잠든 깃털, 새벽의 술집에서 잃어버린 시구를 찾고 있다 너에게 어울리는 너에게는 내가 잘 어울린다 우리는 손을 잡고 어둘음 헤엄치고 빛 속을 걷는다 네 손에는 끈적거리는 달콤한 망고들 네 영혼에는 망각을 자르는 가위들 솟아나는 저녁이 잘 어울린다 너에게는 어린 시절의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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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기도 / 이해인삶 2021. 10. 1. 07:22
10월의 기도 / 이해인 언제나 향기로운 사람으로 살게 하소서 좋은 말과 행동으로 본보기가 되는 사람냄새가 나는 향기를 지니게 하소서 타인에게 마음의 짐이 되는 말로 상처를 주지 않게 하소서 상처를 받았다기보다 상처를 주지는 않았나 먼저 생각하게 하소서 늘 변함없는 사람으로 살게 하소서 살아가며 고통이 따르지만 변함없는 마음으로 한결같은 사람으로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게 하시고 마음에 욕심을 품으며 살게 하지 마시고 비워두는 마음 문을 활짝 열게 하시고 남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게 하소서 무슨 일이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아픔이 따르는 삶이라도 그안에 좋은 것만 생각하게 하시고 건강 주시어 나보다 남을 돌볼 수 있는 능력을 주소서 10월에는 많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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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가을에 서서 / 이해인삶 2021. 9. 22. 22:10
내 나이 가을에 서서 / 이해인 젊었을 적 내 향기가 너무 짙어서 남의 향기를 맡을 줄 몰랐습니다 내 밥그릇이 가득차서 남의 밥그릇이 빈 줄을 몰랐습니다 사랑을 받기만 하고 사랑에 갈한 마음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세월이 지나 퇴색의 계절 반짝 반짝 윤이나고 풍성했던 나의 가진 것들이 바래고 향기마저 옅어지면서 은은히 풍겨오는 다른 이의 향기를 맡게 되었습니다 고픈 이들의 빈 소리도 들려옵니다 목마른 이의 갈라지고 터진 마음도 보입니다 이제서야 보이는 이제서야 들리는 내 삶의 늦은 깨달음 이제는 은은한 국화꽃 향기 같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내 밥그릇 보다 빈 밥그릇을 먼저 채 우겠습니다 받은 사랑 잘 키워서 풍성히 나눠 드리겠습니다 내 나이 가을에 겸손의 언어로 채우겠습니다 오늘은 고향집 앞 논으로 여행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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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우체국 앞에서, 윤도현삶 2021. 9. 15. 22:29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노오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날려가고 지나는 사람들 같이 저 멀리 가는 걸 보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 지난 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있는 나무들 같이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저 홀로 설 수 있을까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우연한 생각에 빠져 날 저물도록 몰랐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 지난 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있는 나무들 같이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저 홀로 설 수 있을까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우연한 생각에 빠져 날 저물도록 몰랐네 날 저물도록 몰랐네 ----- 가을 우체국 앞에서, 윤도현 --- 위기의 시기일수록 자연과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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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편지 / 유진하삶 2020. 11. 23. 04:09
나의 꽃/ 한상경 네가 나의 꽃인 것은 이 세상 다른 꽃보다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네가 나의 꽃인 것은 이 세상 다른 꽃보다 향기로워서가 아니다. 네가 나의 꽃인 것은 내 가슴에 이미 피어 있기 때문이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편지 / 유진하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편지는 당신이었습니다. 가슴 흐린 날에는 당신이 지어주신 그리움을 읽고 눈부시게 맑은 날에는 점 하나만 찍어도 알 수 있는 당신의 웃음을 읽고 저녁 창가에 누군가 왔다 가는 소리로 빗방울 흔들리는 밤에는 당신의 눈동자 속에 담긴 기다림을 읽어내는 내 생애 가장 소중한 편지는 당신이었습니다. 바람 지나면 당신의 한숨으로 듣고 노을 앞에 서면 당신이 앓는 외로움 저리도 붉게 타는구나. 콧날 아리는 사연으로 다가오는 삼백예순다섯 통의 편지 책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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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홀로 아름답지 않다 /송정숙(宋淑)삶 2020. 10. 24. 11:00
가을은 홀로 아름답지 않다 /송정숙(宋淑) 가을은 일상적인 하루를 멋지게 만들어 준다. 거리를 걷고 싶고 창가에서 차를 마시고 싶고 떠나고 싶고 잊혀졌던 사람이 그립다. 가을은 일상적인 하루를 멋지게 만들어 준다. 책 한 권이라도 읽어야 될 것 같고 미웠던 마음도 사라지고 이웃에게 손을 내밀고 곁에 누군가 두고 싶다. 가을은 그렇게 홀로 아름답지 않고 모두를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천천히 호흡해보면 가을도 느리게 느껴진다 더 느리게 더 느리게 지나가시라 오늘이 지나면 내일은 덤처럼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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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에는.... / 이해인삶 2020. 9. 13. 10:22
이 가을에는.... / 이해인 이 가을에는 따뜻한 눈물을 배우게 하소서. 내 욕심으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소리없이 함께 울어줄 수 있는 맑고 따뜻한 눈물을 배우게 하소서. 이 가을에는 빈 가슴을 소유하게 하소서. 집착과 구속이라는 돌덩이로 우리들 여린 가슴을 짓눌러 별처럼 많은 시간들을 힘들어 하며 고통과 번민 속에 지내지 않도록 빈 가슴을 소유하게 하소서. 이 가을에는 풋풋한 그리움 하나 품게 하소서. 우리들 매순간 살아감이 때로는 지치고 힘들어 누군가의 어깨가 절실히 필요할 때 보이지 않는 따스함으로 다가와 어깨를 감싸 안아줄 수 있는 풋풋한 그리움 하나 품게 하소서. 이 가을에는 말 없는 사랑을 하게 하소서. 사랑이라는 말이 범람하지 않아도 서로의 눈빛 만으로도 간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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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낙엽... 최영미삶 2019. 11. 8. 19:05
11월의 낙엽... 최영미 가을비에 젖은 아스팔트. 돌아보면, 떨어질 잎이 하나 남아 있었나. 천둥에 떨고 번개에 갈라진 잎사귀. 심심한 아이들에게는 장난감이 되어주고 종이보다 가벼운 몸으로 더러운 뒷골목을 지키던 너. 허술한 나뭇가지에 목숨을 부지하고 식물의 운명에 순종했던, 상처투성이의 몸에 햇살이 닿으면 촘촘한 세월의 무늬가 드러나지만, 이대로 흔들린다 누군가의 가슴바닥에 훅, 떨어졌으면…… 첫눈이 내려 무거운 눈을 매달고 허공에서 부서지기 전에, 순한 흙에 덮여 잠들었으면…… 낙엽의 비문(碑文)을 읽을 그대는 지금 어디 있는가. -시집 『도착하지 않은 삶』(문학동네, 2009) 큰 사랑을 주신 당신께 감사의 말을 전하지 못하였습니다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