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산행 3

여행자를 위한 서시 / 류시화

여행자를 위한 서시 / 류시화 날이 밝았으니 이제 여행을 떠나야 하리 시간은 과거의 상념 속으로 사라지고 영원의 틈새를 바라본 새처럼 그대 길 떠나야 하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냥 저 세상 밖으로 걸아가리라 한때는 불꽃 같은 삶과 바람 같은 죽음을 원했으니 새벽의 문 열고 여행길 나서는 자는 행복하여라 아직 잠들지 않은 별 하나가 그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그대는 잠이 덜 깬 나무들 밑을 지나 지금 막 눈을 뜬 어린 뱀처럼 홀로 미명 속을 헤쳐가야 하리 이제 삶의 몽상을 끝낼 시간 순간 속에 자신을 유폐시키던 일도 이제 그만 종이꽃처럼 부서지는 환영에 자신을 묶는 일도 이제는 그만 날이 밝았으니, 불면의 베개를 머리맡에서 빼내야 하리 오, 아침이여 거짓에 잠든 세상 등 뒤로 하고 깃발 펄럭이는 영..

2020.01.25

새해 아침의 기도 / 윤보영

새해 아침의 기도 / 윤보영 새해 아침입니다 기다렸던 아침 해를 가슴으로 불러 한 해를 엽니다 올 한 해는 어렵고 힘든 일보다 즐거운 일로 채워졌으면 좋겠습니다 그 즐거운 일로, 함께 즐거워하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새해에는 주위를 배려하며 살겠습니다 내가 말을 많이 하기보다 많이 들어 주고 공감해 주도록 하겠습니다 그 공감이 실천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새해에도 행복하게 보내겠습니다 행복을 크게 그리고 원대하게 생각하지 않고 가까이에 있다고 여기겠습니다 그리고 일상에서 찾겠습니다 지금 순간이 행복이듯 늘 행복하다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꽃을 심겠습니다 예쁜 정원을 만들고 꽃을 보며 웃음이 나올 수 있게 내 안에도 옮겨 심어 가꾸겠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사랑으로..

2019.01.06

눈이 오지 않는 나라 / 노향림

눈이 오지 않는 나라 / 노향림 아직 눈이 오지 않는 나라 이쪽에는 침엽수들이 언 손을 들고 쩔쩔맸다. 창문이 덜컹댔다 열어 놓은 꿈 속으로 눈이 들이치고 사람들은 스스로 녹았다 저마다 가슴 안에 감추어 둔 뜨거운 속말을 스스로 녹은 언어를 흘리며 사람들은 깊은 잠 들었다 잠 속에는 머리와 머리를 맞댄 눈들이 몰려 있다 내일 혹은 그 다음날 새벽에 내릴 첫 눈을 위하여 지붕 위의 바이얼린 / 노향림 한 남자가 지붕 위에서 바이얼린을 켭니다. 날마다 그 소리는 우리집 지붕을 타고 하늘 멀리 올라갑니다. 올라가서 까마득히 한 점 가오리 연(鳶)이 되어 목덜미가 반짝 빛나기도 합니다. 어느날 나는 베란다에 나가 몰래몰래 연줄을 끊어 버렸습니다. 얼레를 채 돌리기도 전에 무언가 뚝 떨어져 박살이 났습니다. 창창..

2016.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