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꽃 이불/ 고정희

농돌이 2017. 6. 27. 21:12

장미꽃 이불/ 고정희

 

얘야,

인생이 추울 때 꺼내 덮을 수 있는

명주솜 이불 두어 채 마련하자꾸나

네가 아무리 당당하게 살아도

혼자 가는 뒷모습 한없이 춥구나

 

어머님 살아생전 마련해 주시마던

명주 솜 이부자리 그대로 비워둔 채

홀연히 저 세상 떠나셨지요

청천 날벼락 같은 그 슬픔의 자리

찬바람 숭숭한 그 자리에 그대

오른손이 모르게 은밀히 놓아주신

장미꽃 이불, 처음 꺼내 덮었습니다

 

내 인생이 추워서가 아니라

이 이불 속에 서리서리 펼쳐주신 그대

곡진한 사랑 음미하고 싶어서지요

이 이불 위에 피고 지고 다시 피는

한 세상 따뜻함 품고 싶어서지요

 

장미꽃 수 천 송이 잔잔한 이불 밑에

우리 동행하는 뜻, 나란히 잠든 밤은

서천서역국 달그림자 쪽으로 수란 잎이 벙그는 밤입니다

장미 향기 수 만 리 은은한 이불 밑에

우리 함께 가는 길, 나란히 누운 밤은

가난한 지붕마다 별들이 내려와

사랑의 보석을 깔아놓은 밤입니다

 

장미 바늘로 누빈 안식의 이불 밑에

이쁜 우리 꿈, 나란히 꽃 핀 밤은

등이 추운 것들 나란히 나란히

쓸쓸한 마음들 나란히 나란히 걸어 들어와

동쪽 바다 밑에서 해 하나씩 건져 올리며

따뜻하고 따뜻하게 얼싸 안는 밤입니다

 

 

 

 

 시간을 구걸해야 할 정도로 할 일이 많다는 건,

 

과연 행복한 일 일까요?

 

삶의 고수는 여유를 가지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