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5

2023년 마지막 출근길에서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 박노해 안데스 산맥의 만년설산 가장 높고 깊은 곳에 사는 께로족 마을을 찾아가는 길에 희박한 공기는 열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고 발길에 떨어지는 돌들이 아찔한 벼랑을 구르며 태초의 정적을 깨뜨리는 칠흑 같은 밤의 고원 어둠이 이토록 무겁고 두텁고 무서운 것이었던가 추위와 탈진으로 주저앉아 죽음의 공포가 엄습할 때 신기루인가 멀리 만년설 봉우리 사이로 희미한 불빛 하나 산 것이다 어둠 속에 길을 잃은 우리를 부르는 께로족 청년의 호롱불 하나 이렇게 어둠이 크고 깊은 설산의 밤일지라도 빛은 저 작고 희미한 등불 하나로 충분했다 지금 세계가 칠흑처럼 어둡고 길 잃은 희망들이 숨이 죽어가도 단지 언뜻 비추는 불빛 하나만 살아 있다면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세계 속에는 어..

2023.12.29

붙잡을 수 없는 것들 /천양희

붙잡을 수 없는 것들 /천양희 세상의 모든 먹는 것 중에서 나이를 먹는 것처럼 먹기 싫은 것이 없고 맛없는 것이 없을 것 같다 세상일이 모두 마음먹기에 달렸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마음을 잘 먹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세월과 나이이다 내가 어떻게 벌써 이 나이인가 믿기지 않을 땐 나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자신감도 없어진다 그까짓 나이쯤이야, 라며 큰소리쳐보지만 삶이 철컥, 자물통을 채워버리는 것 같아 솔직히 겁이 난다 가는 세월 붙잡을 수 없고 세월 따라 먹는 나이를 나도 어쩔 수 없어서다 세월이 약이겠지요' 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 젊은 날의 상처나 슬픔도 세월이 치유해주기 때문이다 젊은 날은 가난이나 고통, 슬픔이나 상처까지도 힘..

2022.08.09

가객 / 정현종

가객 / 정현종 세월은 가고 세상은 더 헐벗으니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새들이 아직 하늘을 날 때 아이들은 자라고 어른들은 늙어가니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동안 무슨 터질 듯한 立場입장이 있겠느냐 항상 빗나가는 구실 무슨 거창한 목표가 있겠느냐 나는 그냥 노래를 부를 뿐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는 동안 나그네 흐를 길은 이런 거지 저런 거지 같이 가는 길 어느 길목이나 나무들은 서서 바람의 길잡이가 되고 있는데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사람들이 걸신걸신을 섬기는 동안 하늘의 눈동자도 늘 보이고 땅의 눈동자도 보이니 나는 내 노래를 불러야지 우리가 여기 살고 있는 동안 ----- 낮술로 붉어진 아, 새로 칠한 뺑끼처럼 빛나는 얼굴, 밤에는 깊은 꿈을 꾸고 낮에는 빨리 취하는 낮술을 마시리라 ..

2022.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