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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주성의 가을!
    문화재,명승,고적 2015. 12. 5. 22:39

     

    지난주 아침,

    잠시 일상 업무를 보고, 복귀하다가 홍주성을 바라보니 아주 멋졌습니다

    잠시 멈추고 겔노트4로 촬영하여 보정하였습니다

    제 고장에 있는 멋진 유적과 정신이 자랑스럽습니다

    많은 아품도 있지만 지난 교황님 방문 시 복자 4분이 탄생하셨고, 순교의 아픔도 있는 곳입니다

    두번의 폭설로 앙상한 가지만 남았습니다

    가을을 기다려야죠! 

     

    사적 제231호로 지정되어 있는 홍주성을 보기에 가장 좋은 곳은 홍주아문 왼편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간 곳이다. 돌을 잘 다듬어 얌전하게 쌓아올린 4m 높이의 석축이 둘러 있다. 현재 남은 길이는 810m 정도인데 이것도 일제 강점기에 일본사람들이 서문과 북문을 철폐하고 성곽을 허무는 것을 읍민들이 강경하게 반대하여 이만큼이나마 남은 것이다. 원래 성곽길이는 1,772m 였다고 하니, 그 모습이 온전히 남아 있었다면 해미읍성, 낙안읍성과 함께 손꼽히는 읍성유적이 되었을 터라 안타깝기 그지없다.

    홍주성은 백제가 멸망했을 때에 부흥군의 중요 거점이었던 주류성으로 추정되기도 하지만 처음 성을 쌓은 것이 언제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조선 초기인 문종 1년(1451)에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하고 각 읍성을 새로운 법식에 따라 고쳐 지을 때에 새로 수축한 모습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 초기의 축성규칙에 따른 모습을 충실히 보여 주어 역사적으로나 학술적으로 그 가치가 높다.

    축성 당시에는 적대()가 24곳, 문이 4곳, 성내에 우물이 2곳 있었으며 둘레에는 해자를 파지 않았다고 한다. 여러 번 수리를 했으나 1870년에 목사 한응필이 동문인 조양문()과 서문인 경의문(), 북문인 망화문()과 관영()을 지었다. 다른 성들과는 달리 남문은 문루가 없는 점이 특이하다. 북문에서는 역대 목사들이 사형수를 처형하였으며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에는 잡혀온 농민군 수백 명이 처형되기도 했다. 또 홍주성이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천둥이 땅에 떨어지는 형세’ 이어서인지 조선 선조 때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싸움을 많이 치른 셈이다.

    그래도 이 성의 역사는 주로 일본의 침략과 관련되어 있다. 고려 때부터 해서 16차례에 걸쳐 왜구의 침공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킨 민세영·이종식 들이 그 이듬해에 화포 6문과 병사 1,100명을 이끌고 와서 홍주성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을 덕산으로 밀어 낸 전적도 있다.

    그러나 앞에 말했듯이 일부만 남고 일본인의 손으로 헐리고 말았다. 근래에 들어서는 1978년에 홍성 지역을 강타한 큰 지진을 만나 석축이 일부 허물어지기도 했으나 3년에 걸쳐 복원했다. 홍성읍의 남산을 둘러싸고 있어 ‘남산공원’의 일부이기도 한 홍주성은 홍성 사람들의 도심 공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성곽 초입에는 한용운의 시 「알 수 없어요」를 박두진의 글씨로 새겨 놓은 시비가 있고 1949년에 세운 김좌진 장군비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길이 약 1,772m의 성벽 가운데 약 800m의 석축 성벽이 남아 있고, 현재 동문인 조양문()과 서문·북문, 그리고 아문과 산성이 포함되어 있다. 처음 축조된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조선 초기 지방행정구역의 개편으로 각 관읍의 읍성을 새로운 규식에 맞추어 수축하게 하였을 때, 이 성도 1451년(문종 1)에 새로 수축되었다. 이때에는 문이 4개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본래는 3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의 구조상 남문이 없는 것은 특이하며 북문에는 문루가 없다. 그때 성의 규모는 성 둘레 4,856척, 높이 11척이었으며, 성첩 608개, 적대 6개가 설치되었고, 성 안에는 우물 2개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현종 때 한계수가 중수하였고, 1824년(순조 24)에 진장 김계묵과 목사 이헌규()가 수리하였다고 수리기적비에 전한다. 이후, 1870년(고종 7) 목사 한응필이 조양문·경의문·망화문·관영을 지었는데, 이 중 조양문 현판은 대원군이 친필을 하사하였다. 현재의 조양문은 1975년 완전 해체, 복원된 것이다.

    이 성은 1895년 동학 농민운동 때 많은 동학교도가 처형되었던 곳이기도 하며, 1905년의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안병찬 등이 이듬해 5월 19일 1,1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당시 이 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6문의 화포로 공격하여 덕산으로 퇴각시키고 점령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한편 1978년 10월 7일 이 지역에서 발생한 강도 5°의 지진으로 성곽의 일부가 붕괴되어 1979년부터 복원작업에 착수하여 1982년 부분적인 보수를 완료한 바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홍주성(洪州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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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끝나는 곳에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