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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 / 김수환 추기경

우산  / 김수환 추기경삶이란 우산을 펼쳤다 접었다 하는 일이요죽음이란 우산이 더 이상 펼쳐지지 않는 일이다성공이란 우산을 많이 소유하는 일이요행복이란 우산을 많이 빌려주는 일이고불행이란 아무도 우산을 빌려주지 않는 일이다사랑이란 한쪽 어깨가 젖는데도하나의 우산을 둘이 함께 쓰는 것이요이별이란 하나의 우산 속에서 빠져나와각자의 우산을 펼치는 일이다연인이란 비오는 날 우산 속얼굴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요부부란 비오는 날 정류장에서우산을 들고 기다리는 모습이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다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갈 줄 알면인생의 멋을 아는 사람이요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가는 사람에게우산을 내밀 줄 알면인생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건 비요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건 우산이다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의 우산이..

2024.08.04

장마 / 안도현

장마 / 안도현창턱으로 뛰어든 빗방울의 발자국 몇 개나 되나 헤아려보자천둥 번개 치면 소나기를 한 천오백근 끊어 와 볶는 중이라고 하자​침묵은 입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비명이거나 울음 같은 것가끔은 시누대숲의 습도를 재며 밥 먹는 직업이 없나 궁리해보고저녁에 저어새 무리가 기착지를 묻거든 줄포만 가는 이정표를 보여주자   꽃도 피는 시기가 다르고,비도 지역마다 내리는 시기가 다르다 꽃도,  비도,,,, 사람도  오는 시기가 다르다

2024.07.14

첫꽃 / 천양희

첫꽃 / 천양희 첫 꽃 사막만년청풀은 첫 꽃을 피우기 위해 사막에서 몇 십년이나 견뎌야 한다는데 연꽃 씨앗은 첫 꽃을 피우기 위해 늪에서 몇 천 년이나 견뎌야 한다는데 사람은 첫 꽃을 피우기 위해 어디에서 몇 년이나 견뎌야 할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고 꽃은 세상이 궁금해서 첫 꽃을 피운다  비오는 날,넘어진 김에 쉬어 갑니다 가끔은 벌도 꽃에게 실망한다니다묵은 마음 장맛비에 씻기우기,,,,!

2024.07.09

등불, 등燈 / 성선경

등불, 등燈 / 성선경 우리집 골목에는 가로등을 끄는 요정이 있어 아침 신문이 배달될 때쯤이면 찰칵, 가로등을 끄지 내가 막 저녁 식사를 끝내고 옥상에 올라 별점을 치는 순간 찰칵, 가로등을 켜듯이 나는 늘 가로등을 켜는 요정을 기다렸으나 늘 내가 잠시 넔을 놓은 시간에 다녀가지 살면서 우리가 늘 세상이 어두워 길을 잃었을 때 무릎을 꿇고 등불을 켜는 요정이 나타나기를 빌지 그때마다 어디선가 등불을 켜는 요정이 나타나 반짝, 하고 우리 앞에 환한 등불을 켜고는 그림자도 없이 요정은 사라지지 그래서 나는 늘 요정의 그림자도 볼 수 없지만 저 환한 등불이 요정의 그림자라 생각하지 내 그림자와 요정의 그림자는 서로 달라 내 그림자는 어둡고 요정의 그림자는 밝지 오늘 아침에도 그래. 내가 아침잠을 털고 일어나 ..

2022.11.15

인연서설 / 문병란

인연서설 / 문병란 꽃이 꽃을 향하여 피어나듯이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는 일이다 물을 찾는 뿌리를 안으로 감춘 채 원망과 그리움을 불길로 건네며 너는 나의 애달픈 꽃이 되고 나는 너의 서러운 꽃이 된다 사랑은 저만치 피어 있는 한 송이 풀꽃 이 애틋한 몸짓 서로의 빛깔과 냄새를 나누어 가지며 사랑은 가진 것 하나씩 잃어 가는 일이다 각기 다른 인연의 한 끝에 서서 눈물에 젖은 눈빛 하늘거리며 바람결에도 곱게 무늬 지는 가슴 사랑은 서로의 눈물 속에 젖어 가는 일이다 오가는 인생길에 애틋이 피어났던 너와 나의 애달픈 연분도 가시덤불 찔레꽃으로 어우러지고, 다하지 못한 그리움 사랑은 하나가 되려나 마침내 부서진 가슴 핏빛 노을로 타오르나니 이 밤도 파도는 밀려와 잠 못..

2022.09.05

빗방울이 두드리고 싶은 것 / 남정림

빗방울이 두드리고 싶은 것 / 남정림 빗방울은 꽃들의 가슴을 두드리고 싶어 ​구름의 절벽에서 떨어져 ​지구로 달려온다 ​ 빗방울은 어두운 대기에 둥근 희망의 사선을 그으며 투명하게 다가선다 ​ ​빗방울이 무지개우산을 두드리면 빛망울은 누군가의 가슴을 두드린다 꽃의 가슴으로 달려가 안기고 만다 긴 연휴가 마무리 되는 저녁입니다 천둥과 빗소리가 성기게 들립니다 내일은, 눈길이 온유한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2022.08.15

그대가 내 곁을 스쳐 가면 / 윤보영

그대가 내 곁을 스쳐 가면 / 윤보영 길을 가다 우연히 정말 우연히 그대가 내 곁을 스쳐 가면 어떻게 할까 모르는 척 아닌 척 지나쳐도 몇 걸음 못 가서 뒤돌아보게 되고 울컥, 달려나온 그리움 때문에 눈물부터 고이겠지 아니야 돌아 설 수 없어 꾹 참고 가던 길을 가야 해 이만큼 지내 왔는데 돌아서면 꽃이 지듯 그대 모습 지워질지 모르잖아 준비 없는 마음에 갑자기 쏟아진 그리움 때문에 다시 담을 수도 없고 아프긴 해도, 오랫동안 사랑으로 머물 수 있도록 지금처럼 그리움을 담고 지내야겠어 사랑하지만 만날 수 없는 그대는 내 하루를 여는 소중한 열쇠니까 길을 가다 우연히 정말 우연히 그대가 내 곁을 스쳐 가면 어떻게 할까 모르는 척 아닌 척 지나쳐도 몇 걸음 못 가서 뒤돌아보게 되고 울컥, 달려나온 그리움 때..

2020.08.08

비가와도 이제는 / 오규원

비가와도 이제는 / 오규원 비가 온다, 어제도 왔다. 비가와도 이제는 슬프지 않다. 슬픈 것은 슬픔도 주지 못하고 제 혼자 내리는 비. 비속으로 사람들이 지나간다 비속에서 우산으로 비가 오지 않는 세계를 받쳐들고 오, 그들은 정말 갈 수 있을까. 우산이 없는 사람들은 오늘도 우산 밖의 비에 젖고 우산이 없는 사람들은 젖은 몸으로 비 오는 세계에 참가한다. 비가 온다. 슬프지도 않은 비. 제 혼자 슬픈 비. 멀정하더니 갑자기 어둡고 비 옵니다 ㅎㅎ

2020.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