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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중얼거리다/기형도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기형도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랑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흔적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룸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폭설과 강풍으로 온 세상을 흔들어대던, 만항재에서 떠나는 겨울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길 위에서..

2018.03.02

길 가는 자의 노래 / 류시화 집을 떠나 길 위에 서면 이름없는 풀들은 바람에 지고 사랑을 원하는 자와 사랑을 잃을까 염려하는 자를 나는 보았네 잠들면서까지 살아갈 것을 걱정하는 자와 죽으면서도 어떤 것을 붙잡고 있는 자를 나는 보았네 길은 또다른 길로 이어지고 집을 떠나 그 길 위에 서면 바람이 또 내게 가르쳐 주었네 인간으로 태어난 슬픔을 다시는 태어나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자와 이제 막 태어나는 자 삶의 의미를 묻는 자와 모든 의미를 놓아 버린 자를 나는 보았네 길 위에서의 생각 / 류시화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 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 한다 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서 생각하니 삶에서 잃은 것도 없고 얻는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녘의 바람처럼 세월을 몰고 다만 멀어져..

2017.12.17

길 / 윤동주

길 / 윤동주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 -- 김용택 시인의 사람들은 왜 모를까 중에서 --

2017.06.04

길,,,, 한승원

길,,,, 한승원 사람에게는 사람의 길이 있고 개에게는 개의 길이 있고 구름에게는 구름의 길이 있다 사람 같은 개도 있고 개 같은 사람도 있다 사람 같은 구름도 있고 구름 같은 사람도 있다 사람이 구름의 길을 가기도 하고 구름이 사람의 길을 가기도 한다 사람이 개의 길을 가기도 하고 개가 사람의 길을 가기도 한다 나는 구름인가 사람인가 개인가 무엇으로서 무엇의 길을 가고 있는가

2014.11.21

삶에게 길을 묻다 / 천양희

삶에게 길을 묻다 / 천양희 가장 큰 즐거움은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라고 누가 말했었지요 그래서 나는 사람으로 살기로 했지요 날마다 살기 위해 일만 하고 살았지요 일만 하고 사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요 일터는 오래 바람 잘 날 없고 인파는 술렁이며 소용돌이쳤지요 누가 목소리를 높이기라도 하면 소리는 나에게까지 울렸지요 일자리 바뀌고 삶은 또 솟구쳤지요 그때 나는 지하 속 노숙자들을 생각했지요 실직자들을 떠올리기도 했지요 그러다 문득 길가의 취객들을 힐끗 보았지요 어둠 속에 웅크리고 추위에 떨고 있었지요 누구의 생도 똑같지는 않았지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사람같이 사는 것이었지요 그때서야 어려운 것이 즐거울 수도 있다는 걸 겨우 알았지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사람같이 산다는 것과 달랐지요 사람으로 살수록 ..

2014.11.05

길-고은 시인-

길 / 고은 시인 길이 없다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숨막히며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간다 여기서부터 역사이다 역사란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부터 미래의 험악으로부터 내가 가는 현재 전체와 그 뒤의 미지까지 그 뒤의 어둠까지이다 어둠이란 빛의 결핍일뿐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길이 없다 그리하여 길을 만들며 간다 길이 있다 길이 있다 수 많은 내일이 완벽하게 오고 있는 길이 있다 답답한 마음에 무작정 떠났던 지리산, 종주 길에서 보여준 운해와 제석봉 나목입니다 힘들고, 조금은 고통스러워도 걷다보면 목표점이 보이고, 도달합니다 힘찬 걸음으로 하루를 시작하세요

2014.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