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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젓한 덕숭산, 수덕사를 돌아보며,,,!
    2019. 1. 5. 10:48

     

     

     

     

    서해를 향한 차령산맥의 낙맥(落脈)이 만들어 낸 덕숭산(德崇山)은 북으로는 가야산(伽倻山), 서로는 오서산, 동남간에는 용봉산(龍鳳山)이 병풍처럼 둘러쌓인 중심부에 서 있다. 이 덕숭산 자락에 많은 고승들을 배출한 한국불교의 선지종찰(禪之宗刹) 수덕사가 자리하고 있다. "백제는 승려와 절과 탑이 많다"라고 중국사서(史書)인 '북사(北史)' , '수서(隨書)', '주서(周書)'에 기록되어 있다. 그 문헌에 나타난 백제 사찰로는 흥륜사(興輪寺), 왕흥사(王興寺), 칠악사(漆岳寺), 수덕사(修德寺), 사자사(師子寺), 미륵사(彌勒寺), 제석 정사(帝釋精寺) 등 12개가 전하지만 현재까지 큰 규모를 유지하고 있는 사찰은 수덕사 뿐이다. 백제사찰인 수덕사의 창건에 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나,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백제 위덕왕(威德王, 554~597) 재위 시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수덕사 경내 옛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와당은 백제시대 창건설을 방증할 수 있는 자료이다.

    수덕사의 고려시대 유물로는 충렬왕 34년(1308)에 건축된 대웅전과 통일신라 말기 양식을 모방한 삼층석탑, 수덕사 출토 고려자기, 수덕사 출토 와당 등 있다. 임진왜란으로 대부분의 가람이 소실되었으나 수덕사 대웅전은 다행히 옛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1937~40년 보수 당시 발견된 대웅전 동측 내부 전면에 기록된 단청개칠기 (丹靑改漆記)에 의하면 중종 23년(1528)에 대웅전 색채보수, 영조 27년(1751), 영조 46년(1770)에 대웅전 보수, 순조 3년(1803)에 대웅전 후면의 부연보수와 풍판의 개수 등 4차례 대웅전 보수가 있었음을 알수 있다.1673년 조성된 수덕사 괘불과 18세기 제작된 수덕사 소종은 조선후기 수덕사의 꾸준한 불사활동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 주요문화재
    수덕사대웅전(국보 제49호)
    수덕사3층석탑(지방유형문화재 103호)
    수덕사7층석탑 육괴정, 황하루, 근역성보관, 사리탑 외

    * 전설

    백제시대에 창건된 수덕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람은 극히 퇴락이 심해 대중창불사를 하여야 했으나 당시의 스님들은 불사금을 조달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묘령의 여인이 찾아와서 불사를 돕기 위해 공양주를 하겠다고 자청하였다. 이 여인의 미모가 빼어난 지라 수덕각시라는 이름으로 소문이 원근에 퍼지게 되니, 이 여인을 구경하러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중 신라의 대부호요 재상의 아들인 '정혜(定慧)'라는 사람이 청혼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불사가 원만성취되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여인의 말을 듣고 이 청년은 가산을 보태어 10년 걸릴 불사를 3년만에 원만히 끝내고 낙성식을 보게 되었다. 낙성식에 대공덕주로서 참석한 이 청년이 수덕각시에게 같이 떠날 것을 독촉하자 '구정물 묻은 옷을 갈아 입을 말미를 주소서'하고 옆방으로 들어간 뒤 기척이 없었다. 이에 청년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하자 여인은 급히 다른 방으로 사라지려 하였다. 그 모습에 당황한 청년이 여인을 잡으려하는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짝만 남기고 사라지니, 갑자기 사람도 방문도 없어지고 크게 틈이 벌어진 바위 하나만 나타나 있었다. 이후 그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는 봄이면 기이하게 버선모양의 버선꽃이 지금까지 피고 있으며 그로부터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이 수덕이었으므로 절이름을 수덕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여인을 사랑한 정혜라는 청년은 인생 무상함을 느끼고 산마루에 올라가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정혜사라 하였다고 한다

     

     (수덕사(템플스테이) http://sudeoksa.templestay.com )

     

     

    0, 경로 : 일주문-선박물관 -환희대 - 만공탑 -정혜사 -정상 -수덕사 -일주문

    0, 동행 : 나홀로 뚜벅이

     

     

     

     

    선박물관 관람하고,,,,  이응노 화백의 숨결이 남아있는 수덕여관으로

     

    어릴적에 수덕사에 오면 이 수덕여관에서 음식도 팔고 했었지요,,,!

    추억을 한장 꺼내봅니다

     

     

    암각화 !

     

    장독대 위, 산감나무에 감이 홍시가 되어 떨어집니다

    오랫만에 환희대도 들려봅니다

     

     

     

     

    계곡길로 오릅니다

     

     

     

     

     

     

     

     

     

     

     

    만공(滿空, 1871년 4월 26일(음력 3월 7일) ~ 1946년 10월 20일)은 조선일제 강점기의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이다. 한국 현대 불교의 대선사로, 석가모니 이래 제76대 조사이다. 속세의 성은 송씨로, 송만공으로도 부른다.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조선 불교를 지키려 하였다. 또한 선불교를 크게 중흥시켜 현대 한국불교계에 큰 법맥을 형성하였다. 본관은 여산(礪山)으로, 본명은 도암(道巖)이다. 법명은 월면(月面)이며 만공은 법호이다.

    그는 이론과 사변을 배제하고 무심의 태도로 화두를 구할 것을 강조하고 간화선(看話禪)의 수행과 보급에 노력하였다. 제자들에게 무자화두에 전념할 것을 가르쳤다. 1940년대에는 덕숭산에 머무르며 선불교의 진흥을 위해 힘쓰다가 1946년 예산 전월사에서 입적했다. 경허(75대) - 만공(76대) - 전강(77대)으로 법맥이 이어졌다. 춘성은 한때 그의 문하에서 수행하기도 했다.

     

    (출처: 위키백과)

     

     

    정혜사 오르는 길

     

     

    참 오래된 해우소,,,!

     

     

     

     

     

     

     

     

    풍경달다 - 정호승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 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소리 들리면

    보고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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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끝나는 곳에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