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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늦가을 백담사 여행
    2020. 11. 17. 22:24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神興寺)의 말사이다. 이 절에 관한 기록으로는 「설악산심원사사적기( 雪嶽山尋源寺史蹟記)」와 한용운(韓龍雲)이 편찬한 『백담사사적(百潭寺史蹟)』이 있다.

     

    『백담사사적』에 의하면, 이 절은 647년(진덕여왕 1) 자장(慈藏)이 설악산 한계리에 창건하였으며, 그 때 아미타삼존불을 조성, 봉안하고 절 이름을 한계사(寒溪寺)라 했다고 한다.

    창건한 지 50여 년 만인 690년(신문왕 10)에 실화(失火)로 소실되어 719년(성덕왕 18)에 재건하였다. 「심원사사적기」에는 이 때의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낭천현(狼川縣)에는 비금사(琵琴寺)가 있었으며, 주위의 산은 짐승들이 많아 사냥꾼들이 많이 찾아들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곳의 산수가 매우 더러워졌지만, 비금사 승려들은 그것을 모른 채 샘물을 길어 부처님에게 공양하였다. 그와 같은 더러움을 싫어한 산신령은 하룻밤 사이에 절을 설악산의 대승폭포 아래의 옛 한계사터로 옮겼다.

    그 사실을 모르는 승려와 과객들이 아침에 깨어나 보니 비금사는 틀림없었지만, 기암괴석이 좌우에 늘어서고 전후에 쏟아지는 폭포가 있는 산은 이전과 달랐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몰라할 때 갑자기 관음청조(觀音靑鳥)가 날아가면서 “낭천의 비금사를 옛 한계사로 옮겼노라.”고 하여 사람들에게 그 신이함을 알렸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이 전설은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 지방 사람들 사이에는 춘천 부근의 절구골, 한계리의 청동골 등의 지명이 절을 옮길 때 청동화로와 절구를 떨어뜨렸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하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 전설을 통하여 한계사를 중창할 때 비금사를 옮겨간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그 뒤 785년(원성왕 1)에 다시 불탔으며, 종연(宗演)·광학(廣學)·각동(覺洞)·영희(靈熙)·법찰(法察)·설흡(雪洽) 등이 중건을 서둘러 790년에 한계사 터 아래 30리 지점에 이건하고 절 이름을 운흥사(雲興寺)라고 하였다.

    그러나 984년(성종 3) 다시 불탔으므로 승려 동훈(洞薰)·준희(俊熙) 등이 운흥사지 북쪽 60리쯤 되는 곳으로 이건하고 987년 심원사(深源寺)라고 개명하였다.

    「심원사사적기」에는 이 때 법당·극락전·벽운루(碧雲樓)·선승당(禪僧堂)·동상실(東上室) 등의 건물을 중수하였으며, 부속 암자로는 동암(東庵)·원명암(元明庵)·백련암(白蓮庵)·오세암(五歲庵)·봉정암(鳳頂庵) 등이 있었으며, 동훈·준희 등의 뛰어난 고승들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뒤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약 450년 동안은 별다른 변화 없이 전승되다가 1432년(세종 14)에 네 번째의 화재로 절이 전소되었다. 그 뒤 2년 만에 동하(洞下) 30리쯤 되는 곳에 선구사(旋龜寺)라고 개칭하고, 의준(儀俊)·해섬(海暹)·취웅(翠雄) 등이 법당과 극락전, 요사채 2동을 세웠다.

    그러나 1443년에 화재로 다시 소실되었고, 1447년에 옛터의 서쪽 1리쯤 되는 곳에 다시 절을 세우고 영축사(靈鷲寺)라 하였다.

    그러나 김시습(金時習)이 부속 암자인 관음암(觀音庵)에 와서 머리를 깎고 출가했던 1455년(세조 1)에 화재로 소실되어 재익(載益)·재화(載和)·신열(愼悅) 등이 옛 절터의 상류 20리 지점에 중건하고 백담사라고 개칭하였다.

    1775년(영조 51) 겨울에 다시 불에 타서 승려들은 흩어졌지만, 최붕(最鵬)이 태현(太賢)·태수(太守) 등과 인법당(因法堂)을 짓고 심원사(尋源寺)라 개칭한 뒤 6년 동안 머물면서 법당과 향각(香閣) 등의 건물을 중건하였다.

    심원사를 다시 백담사로 개칭한 것은 최붕과 설담(雪潭)이 절을 중건한 1783년(정조 7)이었고, 이 때의 백담사라는 이름이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출처 : 다음백과)

    현재의 이름인 백담사는 7차에 걸친 실화가 닥쳤고, 그 때마다 터전을 옮기면서 이름을 바꾸었다.

    백담사라는 이름은 골이 깊고 흐르는 물의 연원이 먼 내설악에 자리한 절이라는 뜻이나, 거듭되는 화재를 피해보고자 하는 뜻이 담겨진 이름이라는 설을 다음의 전설로 알 수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화재가 있을 때마다 주지스님의 꿈에 도포를 입고 말을 탄 분이 나타나 변을 알려주었다고 하는데 기이하게도 지금도 이 근처에 도포를 입고 말을 탄 듯한 암석이 솟아 있다.

    거듭되는 화재로 절 이름을 고쳐보려고 하던 어느 날 밤, 주지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대청봉에서 절까지 웅덩이[潭]를 세어 보라고 하여 이튿날 세어보니 꼭 100개에 달하였다. 그래서 담자를 넣어 백담사라 이름을 고치는 동시에 지금의 장소로 옮겼는데, 담자가 들었기 때문에 그 뒤부터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1915년 겨울밤에 일어난 화재는 불상과 탱화 20여 위(位)를 제외한 건물 70여 칸과 경전·범종까지도 모두 태워 버렸다. 당시의 주지 인공(印空)은 사무(寺務)를 오세암에서 행하면서 백담사의 중건에 착수하였고, 기호(基鎬)와 인순(仁淳) 등이 그를 도왔다.

    강원도 일대를 다니면서 시주받은 1,786원 30전으로 1919년 4월에 법당 20칸과 화엄실(華嚴室) 20칸을 건립하였으며, 1921년 봄에는 응향각(凝香閣) 및 사무실 30칸 등을 이룩하고, 종과 북을 새로이 주조하여 낙성법회(落成法會)를 열었다.

    한용운이 『백담사사적』을 편찬한 1928년 당시의 백담사는 복구가 끝나고 정리가 되어 있을 때였다.

    근대에 이르러 백담사는 한용운이 머물면서 『불교유신론(佛敎維新論)』과 『십현담주해( 十玄談註解)』·『님의 침묵』을 집필하는 장소가 되었고 만해사상의 고향이 되었다. 그러나 이 절은 6·25전쟁 때 소실되었으며, 1957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 : 다음백과)

    특징

     

    현존하는 당우로는 정면의 대웅보전(大雄寶殿)을 중심으로 좌우에 칠성각(七聖閣)·선원(禪院)·요사채 등이 있고, 남쪽으로 150m 떨어진 곳에 관음전(觀音殿)이 있다.

    산내의 부속 암자는 현존하는 것보다 이미 폐허가 된 것이 많다. 한용운은 유지(遺址)만 남아 있는 역사 미상의 암자로서 동암·백련암·원명암·은선암(隱仙庵)·극락암(極樂庵)·오봉암(五峯庵)·복호암(伏虎庵)·지장암(地藏庵)·흥성암(興盛庵)·자장암(慈藏庵)·금선암(金仙庵) 등 11개가 있었다고 『백담사사적』에 기록하고 있다.

    이 밖에도 폐허가 되어버렸지만, 1777년에 창건한 통선암(通禪庵)과 심적암(深寂庵), 1864년(고종 1)에 역암(饑庵)이 창건하였고 1919년에 훼철된 보문암(普門庵), 1884년에 창건한 축성암(祝聖庵) 등이 있다.

    현존하는 부속 암자로는 643년(선덕여왕 12)에 자장이 창건하여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함으로써 전국의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의 한 곳이 된 봉정암, 자장이 선실(禪室)로 사용하기 위해서 창건하고 주석하다가 관음진신(觀音眞身)을 친견한 뒤 관음암(觀音庵)이라고 하였으며, 뒤에 다섯살의 신동이 관세음보살을 부르다가 견성(見性)한 곳이라 하여 절 이름을 바꾼 오세암, 1648년 유학자 김창흡(金昌翕)이 은거하기를 맹세하고 창건한 영시암(永矢庵), 구전으로 전해져오던 옛 절터에 1903년 원호(源湖)가 세운 원명암(圓明庵) 등이 있다.

     

    (출처 : 다음백과)

    백담사는 내설악에 가야동 계곡과 구곡담을 흘러온 맑은 물이 합쳐지는 백담계곡 위에 있어 내설악을 오르는 길잡이도

    되고 오세암을 거쳐 마등령과 공룡능선으로 오르는 길목입니다

     

    이 다리 위에서 계곡의 끝을 바라보며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고 왔습니다

     

    댓글

길이 끝나는 곳에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