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는/최영미

농돌이 2017. 8. 29. 18:18

가을에는/최영미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 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수수)

 

(부추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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