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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기도 / 김현승

가을의 기도 / 김현승 가을에는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시간(時間)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호올로 있게 하소서.나의 영혼,굽이치는 바다와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가을이 저물어 갑니다가을이 무엇이라고,,,, 사랑도 배워야 한답니다

2024.11.11

하루,86'400초

길 위에서의 생각 / 류시화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집이 있는 자는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한다. 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서 생각하니삶에서 잃은 것도 없고얻은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녘의 바람처럼세월을 몰고다만 멀어져 갔다 어떤 자는 울면서 웃는 날을 그리워하고웃는 자는 또 웃음 끝에 다가올울음을 두려워한다. 나 길가에 피어난 풀에게 묻는다.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으며또 무엇을 위해 살지 않았는가를 살아있는 자는 죽을 것을 염려하고죽어가는 자는더 살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하고어떤 나그네는자유에 지쳐 길에서 쓰러진다.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다고 생각하는 것을,누구는 스스로어떤이는 지인에게 묻습니다 많은 이야기 중에서도,내가 보고 느낀 것이 판단이라는 함지에 담겨..

2024.11.05

인제 비밀의 정원에서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내 가슴에 쿵쿵거린다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 곳에서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너였다가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다시 문이 닫힌다사랑하는 이여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아주 오핸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혼자 있는 ..

2024.10.27

밀물 / 정끝별

밀물 / 정끝별 가까스로 저녁에서야두 척의 배가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벗은 두 배가나란히 누워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무사하구나 다행이야응, 바다가 잠잠해서 어떤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면,  혼자인 느낌이 드는 시간이 있다살펴보고 느껴보면 혼자는 아니었다바람, 석양, 자연의 소리들--그래서 가끔 문을 나서는 것인지 모르겠다

2024.10.20

이응노네 가을

연필 깍는 시간 / 김재진 마음속에서 누군가속삭이듯 이야기할 때 있습니다.사각거리며 걸어가는 눈 위의 발소리처럼내 마음속의 백지 위로 누군가긴 편지 쓸 때 있습니다.한 쪽 무릅 세우고뭔가를 깎아 보고 싶어 연필을 손에 쥡니다.주전자의 물이 끓는 겨울 저녁 9시유리창엔 김이 서립니다.내 마음에도 김이 서립니다.때로 몸이 느끼지 못하는 걸마음이 먼저 느낄 때 있습니다.채 깎지 않은 연필로 종이 위에'시간'이라 써 봅니다.좀더 크게 '세월'이라 써 봅니다.아직도 나는내게 허용된 사랑을 다 써버리지 않았습니다   살면서 가끔은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난다그러면서 되돌아본다심각하게 체감도 하고,,,,파멸처럼 싸운다생의 한모퉁이를 돌아선 지금,,,세상은 온갖 훌륭한 이론과 철학, 과학,,,, 등이 있지만 몹시도 귀한..

2024.09.27

아름다운 이별 / 윤수천

아름다운 이별 / 윤수천 우리는 헤어지는 과정을 통해비로소 오래 빛날 수 있다.저 높은 곳의 별처럼멀리 떨어져 있음으로써더욱 확실할 수 있다. 누가 이별을 눈물이라 했는가아픔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빛날 수도 없다아픔이 크면 클수록 더욱 빛나는이별은 인생의 보석이다. 헤어짐을 서러워하지 말라이별은 초라하고 가난한 인생에소중하고 눈부신 보석을 붙이는 일두고두고 빛날 수 있는사랑의 명패를 다는 일   아름다운 사치!살다보니 내것을 , 아니면 남의 것을 계산하고,,, 잡고 있느라,,,, 나의 삶에 더 많은 것을 이울수 있었을 것이다허비하고,,,탐하지 않았다면 추석을 지나고 아직은 달이 밝다어둠속에서 저렇게 밝은, 향기로운 빛이 되고 싶었다생각해보렵니다나를 억제하고 다스러온 긴 억제의 시간들어머니를 생각합니다

2024.09.24

노을 시편/천양희

노을 시편/천양희강 끝에 서서 서쪽으로 드는노을을 봅니다노을을 보는 건 참 오래된 일입니다오래되어도 썩지 않는 것은 하늘입니다하늘이 붉어질 때 두고 간 시들이생각났습니다 피로 써라그러면....생각은새떼처럼 떠오르고나는 아무 것도쓸 수 없어마른풀 몇 개를 분질렀습니다피가 곧 정신이니....노을이 피로 쓴 시 같아노을 두어 편 빌려 머리에서 가슴까지길게 썼습니다 길다고 다 길이겠습니까그때 하늘이 더 붉어졌습니다피로 쓴 것만을사랑하라....내 속으로 노을 뒤편이드나들었습니다쓰기 위해 써버린 많은 글자들 이름들붉게 물듭니다노을을 보는 건 참 오래된 일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사랑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되기도 한다그리곤 살과 뼈를 깍는 고통을 통해서만 발전을 이루는게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는 순간,그는 더더욱 사..

2024.09.20

전어 / 이성복

전어 / 이성복  네 생각나면집 나간 며느리도돌아온다는 가을 전어남해 비토리에서손가락 두 개 포갠 크기의너의 몸 회 뜨는 것을 보았다네 모가지를 비스듬히 자르는 것은조금이라도 버려지는 살이아까워서였다잘린 모가지엔 검은 피가 묻어 있지만내장을 훑어낸 뱃대기는창포묵처럼 투명하였다인적 없는바닷가 모텔에서,입안에 녹아 흐르는 너의 살로피로한 연애의 여흥을 돋우는 것을모가지 잘리고서도너는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서해안 전어잡이 배들----) 가끔은,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사람들을 마주하며 삽니다그중 최고는 제가 유별납니다만...?삐지고, 지날나고,,, 관심을 가지고 깊이 바라보면, 귀하고 빛나는 삶이거늘 ,,,  내가 못보고 지나칠뿐,,,,  아름다운 사치일지도 모른다 이번 추석은 살아남는 것이 참 아름답다는 ..

2024.09.18

어느 날의 커피 / 이해인

어느 날의 커피 / 이해인​어느날혼자 가만히 있다가갑지기 허무해지고아무 말도 할 수 없고​가슴이 터질 것만 같고눈물이 쏟아지는데누군가를 만나고 싶은데만날 사람이 없다​주위에는 항상친구들이 있다고 생각했는데이런날 이런 마음을들어줄 사람을 생각하니​수첩에 적힌 이름과 전화번호를읽어내려가 보아도모두가 아니었다​혼자 바람 맞고 사는 세상거리를 걷다 가슴을 삭이고 마시는 뜨거운 한잔의 커피​아! 삶이란때론 이렇게 외롭구나​

2024.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