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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마지막 출근길에서삶 2023. 12. 29. 09:31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 박노해 안데스 산맥의 만년설산 가장 높고 깊은 곳에 사는 께로족 마을을 찾아가는 길에 희박한 공기는 열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고 발길에 떨어지는 돌들이 아찔한 벼랑을 구르며 태초의 정적을 깨뜨리는 칠흑 같은 밤의 고원 어둠이 이토록 무겁고 두텁고 무서운 것이었던가 추위와 탈진으로 주저앉아 죽음의 공포가 엄습할 때 신기루인가 멀리 만년설 봉우리 사이로 희미한 불빛 하나 산 것이다 어둠 속에 길을 잃은 우리를 부르는 께로족 청년의 호롱불 하나 이렇게 어둠이 크고 깊은 설산의 밤일지라도 빛은 저 작고 희미한 등불 하나로 충분했다 지금 세계가 칠흑처럼 어둡고 길 잃은 희망들이 숨이 죽어가도 단지 언뜻 비추는 불빛 하나만 살아 있다면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세계 속에는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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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살아낸다는 건 / 황동규삶 2023. 12. 27. 09:09
삶을 살아낸다는 건 / 황동규 다 왔다. 동녘 하늘이 자잔히 잿빛으로 바뀌기 시작한 아파트 동과 동 사이로 마지막 잎들이 지고 있다, 허투루루. 바람이 지나가다 말고 투덜거린다. 엘리베이터 같이 쓰는 이웃이 걸음 멈추고 같이 투덜대다 말고 인사를 한다. 조그만 인사, 서로가 살갑다. 얇은 서리 가운 입던 꽃들 사라지고 땅에 꽂아논 철사 같은 장미 줄기들 사이로 낙엽은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밟히면 먼저 떨어진 것일수록 소리가 엷어진다. 아직 햇빛이 닿아 있는 피라칸사 열매는 더 붉어지고 하나하나 눈인사하듯 똑똑해졌다. 더 똑똑해지면 사라지리라. 사라지리라, 사라지리라 이 가을의 모든 것이, 시각을 떠나 청각에서 걸러지며. 두터운 잎을 두르고 있던 나무 몇이 가랑가랑 마른기침 소리로 나타나 속에 감추었던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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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이율배반 / 이정하삶 2023. 12. 25. 14:12
사랑의 이율배반 / 이정하 그대여 손을 흔들지 마라.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떠나는 사람은 아무 때나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겠지만 남아 있는 사람은 무언가 무작정 기다려야만 하는가. 기약도 없이 떠나려면 손을 흔들지 마라. 사는 곳에 계속 폭설이 내렸습니다 오늘은 푹한 날씨에 길도 좀 녹아내립니다 푸른 색감이 그립습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몇 년만에 맞이합니다 전쟁,질병, 가난, 기아 등 등으로 고통받는 이웃이 없기를 소망합니다 재벌들도 소천하시면 한 줌의 재가 되어 가는 것을 봅니다 생명이 살아있는 동안에 ,,, 영화 레미제라불의 명대사를 되뇌어 봅니다 인생은 소유가 아니라 나누어 주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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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바다 / 이해인삶 2023. 12. 22. 18:49
겨울바다 / 이해인 내 쓸모없는 생각들이 모두 겨울 바닷속으로 침몰해 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누구도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일 때 바다를 본다 누구도 사랑하기 어려운 마음일 때 기도가 되지 않는 답답한 때 아무도 이해 못 받는 혼자임을 느낄 때 나는 바다를 본다. 참 아름다운 바다 빛 하늘빛 하느님의 빛 그 푸르디푸른 빛을 보면 누군가에게 꼭 편지를 쓰고 싶다 사랑이 길게 물 흐르는 바다에 나는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정합니다 어느 순간에는 가장 흥청망청 쓰는 것이기도 합니다 태양이 뜨기 전에 가장 어둡고, 빛이 없듯이,,,, 동지 절기를 지나면서, 태양은 다시 양기를 품기 시작한답니다 지루할 틈이 없는 삶을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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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눈발이라면 / 안도현삶 2023. 12. 17. 16:50
우리가 눈발이라면 / 안도현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 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시간 참 빠릅니다 미안하다고,,,, 사랑하다고 ,,,, 감사하다고,,, 아직 말하지 못했는데, 연말로 달려 갑니다 내가 가진 것만 소중히 생각했던 사람, 나 좀 욕심이 작아져 가면서 살아가는 내가 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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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사랑 / 박노해삶 2023. 12. 16. 17:04
겨울 사랑 / 박노해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에게 겨울이 없다면 무엇으로 따뜻한 포옹이 가능하겠느냐 무엇으로 우리 서로 깊어질 수 있겠느냐 이 추운 떨림이 없다면 꽃은 무엇으로 피어나고 무슨 기운으로 향기를 낼 수 있겠느냐 나 언 눈 뜨고 그대를 기다릴 수 있겠느냐 눈보라 치는 겨울밤이 없다면 추워 떠는 자의 시린 마음을 무엇으로 헤아리고 내 언 몸을 녹이는 몇 평의 따뜻한 방을 고마워하고 자기를 벗어버린 희망 하나 커 나올 수 있겠느냐 아아 겨울이 온다 추운 겨울이 온다 떨리는 겨울 사랑이 온다 바다는 자신을 그대로 내보인다 우리의 인생도 똑같다 필요 이상으로 숨길 필요도, 꾸밀 필요도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 나 자신을 보이며 나아가면 된다 ---- 이주영, 모든 삶은 흐른다 중에서 --- 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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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날 동네 산책산 2023. 12. 16. 10:46
겨울 노래 / 마종기 눈이 오다 그치는 나이 그 겨울 저녁에 노래 부른다 텅 빈 객석에서 눈을 돌리면 오래 전부터 헐벗은 나무가 보이고 그 나무 아직 웃고 있는 것도 보인다 내 노래는 어디서고 끝이 나겠지 끝나는 곳에는 언제나 평화가 있었으니까 짧은 하루가 문 닫을 준비를 한다 아직도 떨고 있는 눈물의 몸이여 잠들어라 혼자 떠나는 추운 영혼 멀리 숨어 살아야 길고 진한 꿈을 가진다 그 꿈의 끝막이 빈 벌판을 헤매는 밤이면 우리가 세상의 어느 애인을 찾아내지 못하랴 어렵고 두려운 가난인들 참아내지 못하랴 상추밭에 소복합니다 철지난 꽃밭에도,,,, (이응노화백 생가지) 밤새 시골집 창문이 덜렁거리고, 바람 소리가 났습니다 불을 끄면 조용한 세상이 시골인지라, 바람소리도 친구가 됩니다 아침부터 힌눈이 쌓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