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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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다의 꿈 / 박노해삶 2023. 1. 26. 21:37
시다의 꿈 / 박노해 긴 공장의 밤 시린 어깨 위로 피로가 한파처럼 몰려온다 드르륵 득득 미싱을 타고, 꿈결 같은 미싱을 타고 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는 시다의 언 손으로 장밋빛 꿈을 잘라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을 싹뚝 잘라 피 흐르는 가죽본을 미싱대에 올린다 끝도 없이 올린다 아직은 시다 미싱대에 오르고 싶다 미싱을 타고 장군처럼 당당한 얼굴로 미싱을 타고 언 몸뚱아리 감싸 줄 따스한 옷을 만들고 싶다 찢거진 살림을 깁고 싶다 떨러 오는 온몸을 소름치며 가위질 망치질로 다짐질하는 아직은 시다, 미싱을 타고 미싱을 타고 갈라진 세상 모오든 것들을 하나로 연결하고 싶은 시다의 꿈으로 찬 바람 치는 공단거리를 허청이며 내달리는 왜소한 시다의 몸짓 파리한 이마 위으로 새벽별 빛나다 오랜 지인의 생일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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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불타고 있다 / 박노해삶 2022. 11. 8. 22:16
삶이 불타고 있다 / 박노해 그 시대 젊은 우리는 프로메테우스가 되고자 했다 신으로부터 불을 훔쳐 와 춥고 가난한 지상의 인간에게 주는, 그리하여 쇠사슬에 묶여 날마다 적의 부리에 심장을 파먹혀가는, 어둠의 시대는 가고 불의 시대가 왔다 기술의 불과 권리의 불과 탐욕과 질시와 재미의 불이 인간의 감각을 불지르고 대지와 하늘을 불지르고 오래된 전승과 신성한 지혜와 자신의 영혼을 불지르고 삶 자체를 불지르도다 반신반인들의 불타는 지구여 더 많은 불을 바라는 시대여 어둠 속 동굴에 묶인 나는 녹슨 쇠사슬에 풀려나 불타는 세계를 걸었노라 그로부터 나는 다시 침묵의 설산으로 올라가 세계의 희망이 어떻게 살해되어 가는지를 보았노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산정에 앉아 홀로 울었노라 불타는 세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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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 오늘처럼만 사랑하자삶 2022. 11. 4. 07:24
박노해 / 오늘처럼만 사랑하자 오늘은 사랑 하나로 눈부신 날 우리 오늘처럼만 사랑하자 검푸른 우주 어느 먼 곳에서 그대와 내 별의 입맞춤이 있어 떨리는 그 별빛 이제 여기 도착해 사랑의 입맞춤으로 환히 빛나니 우리 오늘처럼만 사랑하자 오늘은 사랑 하나로 충분한 날 우리 오늘처럼만 걸어가자 바람 부는 길 위에서 그대와 나 작은 씨알처럼 가난할지라도 가슴에 새긴 입맞춤 하나로 함께 가는 걸음마다 꽃을 피우리니 우리 오늘처럼만 사랑하자 오늘은 사랑 하나로 감사한 날 우리 오늘처럼만 바라보자 태양이 하루도 쉬지 않고 비추이듯 좋은 날도 힘든 날도 함께 앞을 바라보며 세상의 아프고 힘든 또 다른 나에게 이 한 생이 다하도록 끝이 없는 사랑으로 우리 오늘처럼만 사랑하자 이 한 생이 다하도록 끝이 없는 사랑으로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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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발바닥이다 / 박노해산 2021. 10. 25. 15:03
사랑은 발바닥이다 / 박노해 머리는 너무 빨리 돌아가고 생각은 너무 쉽게 뒤바뀌고 마음은 날씨보다 변덕스럽다 사람은 자신의 발이 그리로 가면 머리도 가슴도 함께 따라가지 않을 수 없으니 발바닥이 가는 대로 생각하게 되고 발바닥이 이어주는 대로 만나게 되고 그 인연에 따라 삶 또한 달라지리니 현장에 딛고 선 나의 발바닥 대지와 입맞춤하는 나의 발바닥 내 두 발에 찍힌 사랑의 입맞춤 그 영혼의 낙인이 바로 나이니 그리하여 우리 최후의 날 하늘은 단 한 가지만을 요구하리니 어디 너의 발바닥 사랑을 좀 보자꾸나 못쓸 것이 되어가는 삶에서 가을은 특별합니다 당장 의미가 있건 없건 멈추지도 못합니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삶에서 더욱 멈출 수 없습니다 이런 날 말해준다면 두고두고 값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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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선/박노해삶 2020. 12. 13. 09:44
한계선/박노해 옳은 일을 하다가 한계에 부딪혀 더는 나아갈 수 없다 돌아서고 싶을 때 고개들어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라. 여기서 돌아서면 앞으로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너는 도망치게 되리라. 여기까지가 내 한계라고 스스로 그어버린 그 한계선이 평생 너의 한계가 되고 말리라. 옳은 일을 하다가 한계에 부딪혀 그만 금을 긋고 돌아서고 싶을 때 묵묵히 황무지를 갈아가는 일소처럼 꾸역꾸역 너의 지경을 넓혀가라.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하루의 시간, 우리는 현재(Present)를 선물(Present) 이라고 부릅니다 선물같은 나의 하루를 행복이 반짝이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