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
겨울비 / 신경희삶 2024. 1. 20. 13:03
겨울비 / 신경희 어제밤 꿈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낙엽지는 가을 내내 당신의 안부가 궁금하였지만 끝내 소식없이 가을 낙엽과 함께 보내고 겨울비가 내리는 새벽에서야 꿈에서 당신을 만났습니다. 안녕 하신지요. 엽서 한장 보내고 싶은 마음에는 낙엽이 가득히 쌓이고 침묵속에 당신의 행복을 위하여 가만히 두손을 모았습니다. 꿈속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아직은 인연의 끝이 아니기에 늦은 가을편지를 겨울비에 실어서 보내드립니다. 거름이 되기위해 몸을 흔들어 떨어지는 낙엽의 섭리를 알아가 듯이 때로는 가장 소중하면서도 끝내 소유할 수 없음도 알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된다는 것을 쌓여가는 낙엽위로 별빛이 내려 앉듯이 오늘은 겨울비가 차곡히 쌓입니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관계의 기본..
-
새벽바람 / 강은교삶 2024. 1. 14. 13:58
새벽바람 / 강은교 이제 일어설까 일어서 떠나볼까 새벽 바람이 도착하니 어둠은 슬며시 물러가는구나 모든 잠의 옷섶에서 삐져나온 꿈들을 벚나무 흐린 그림자를 핥으며 뒤숲으로 빨리 사라진다 이제 일어설까 일어서 떠나 볼까 나의 허약한 아버지가 나를 부르고 있으니 가장 작은 지상의 것들이 나를 부르고 있으니 지상에서 가장 작은 불을 켤 수밖에 없는 이를 위하여 눈물 하나가 끌고 가는 눈물을 위하여 하루치 그림자밖에 없는 이를 위하여 어디서 울고 있는 애인들을 위하여 어디서 웃고 있는 순간 입들을 위하여 여기 추억은 추억의 손을 쓰다듬으며 놓지 않은 곳 오래도록 지구를 돌아다니고 있는 구름이 어슬렁어슬렁 안개의 이불을 꿰매고 있는 곳 이제 일어설까 일어서 떠나볼까 모든 길들은 서로 부둥켜 안고 숨을 헐떡이고 있..
-
첫날, 용봉산에서 해맞이 합니다산 2024. 1. 1. 11:04
새해 아침에 / 홍수희 내게는 사랑만 남게 하소서 주고서 받을 셈은 잊게 하시고 더 주지 못한 아쉬움만 갖게 하소서. 내게는 사랑만 남게 하소서 받고 싶은 한 마디는 잊게 하시고 주어야 할 한 마디만 내내 기억하게 하소서. 내게는 사랑만 남게 하소서 창가에는 불빛 하나 걸어두게 하시고 문 두드리는 소리 행여 외면하지 않게 하소서. 내게는 사랑만 남게 하소서 현란한 겉치레의 행적(行蹟)보다는 관심의 작은 몸짓 하나가 부디 기적의 시작임을 알게 하소서. 내게는 사랑만 남게 하소서 격식이나 체면에는 덤덤하게 하시고 진실로 서야 할 자리를 분별하는 견고한 지혜를 허락하소서. 내게는 사랑만 남게 하소서 일상(日常)의 소중함을 알게 하시고 오늘이 곧 영원으로 이어진 길 위에 놓여 있음을 알게 하소서. 새해에는 사랑..
-
삶을 살아낸다는 건 / 황동규삶 2023. 12. 27. 09:09
삶을 살아낸다는 건 / 황동규 다 왔다. 동녘 하늘이 자잔히 잿빛으로 바뀌기 시작한 아파트 동과 동 사이로 마지막 잎들이 지고 있다, 허투루루. 바람이 지나가다 말고 투덜거린다. 엘리베이터 같이 쓰는 이웃이 걸음 멈추고 같이 투덜대다 말고 인사를 한다. 조그만 인사, 서로가 살갑다. 얇은 서리 가운 입던 꽃들 사라지고 땅에 꽂아논 철사 같은 장미 줄기들 사이로 낙엽은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밟히면 먼저 떨어진 것일수록 소리가 엷어진다. 아직 햇빛이 닿아 있는 피라칸사 열매는 더 붉어지고 하나하나 눈인사하듯 똑똑해졌다. 더 똑똑해지면 사라지리라. 사라지리라, 사라지리라 이 가을의 모든 것이, 시각을 떠나 청각에서 걸러지며. 두터운 잎을 두르고 있던 나무 몇이 가랑가랑 마른기침 소리로 나타나 속에 감추었던 가지..
-
사랑의 이율배반 / 이정하삶 2023. 12. 25. 14:12
사랑의 이율배반 / 이정하 그대여 손을 흔들지 마라.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떠나는 사람은 아무 때나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겠지만 남아 있는 사람은 무언가 무작정 기다려야만 하는가. 기약도 없이 떠나려면 손을 흔들지 마라. 사는 곳에 계속 폭설이 내렸습니다 오늘은 푹한 날씨에 길도 좀 녹아내립니다 푸른 색감이 그립습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몇 년만에 맞이합니다 전쟁,질병, 가난, 기아 등 등으로 고통받는 이웃이 없기를 소망합니다 재벌들도 소천하시면 한 줌의 재가 되어 가는 것을 봅니다 생명이 살아있는 동안에 ,,, 영화 레미제라불의 명대사를 되뇌어 봅니다 인생은 소유가 아니라 나누어 주는 것 입니다
-
겨울 사랑 / 박노해삶 2023. 12. 16. 17:04
겨울 사랑 / 박노해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에게 겨울이 없다면 무엇으로 따뜻한 포옹이 가능하겠느냐 무엇으로 우리 서로 깊어질 수 있겠느냐 이 추운 떨림이 없다면 꽃은 무엇으로 피어나고 무슨 기운으로 향기를 낼 수 있겠느냐 나 언 눈 뜨고 그대를 기다릴 수 있겠느냐 눈보라 치는 겨울밤이 없다면 추워 떠는 자의 시린 마음을 무엇으로 헤아리고 내 언 몸을 녹이는 몇 평의 따뜻한 방을 고마워하고 자기를 벗어버린 희망 하나 커 나올 수 있겠느냐 아아 겨울이 온다 추운 겨울이 온다 떨리는 겨울 사랑이 온다 바다는 자신을 그대로 내보인다 우리의 인생도 똑같다 필요 이상으로 숨길 필요도, 꾸밀 필요도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 나 자신을 보이며 나아가면 된다 ---- 이주영, 모든 삶은 흐른다 중에서 --- 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