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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시를 쓴다 / 최영미
    2016. 9. 22. 22:59

    나는 시를 쓴다 / 최영미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혀를 깨무는 아픔 없이
    무서운 폭풍을 잠재우려
    봄꽃의 향기를 가을에 음미하려
    잿더미에서 불씨를 찾으려
    저녁놀을 너와 함께 마시기 위해
    싱싱한 고기의 피로 더렵혀진 입술을 닦기 위해
    젊은날의 지저분한 낙서들을 치우고
    깨끗해질 책상서랍을 위해
    안전하게 미치기 위해
    내 말을 듣지 않는 컴퓨터에 복수하기 위해
    치명적인 시간들을 괄호 안에 숨기는 재미에
    뿌끄러움을 감추려, 詩를 저지른다

     

     

    최영미 / 가을에는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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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끝나는 곳에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