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 앞에서 / 이해인

농돌이 2023. 3. 18. 10:04

매화 앞에서  / 이해인

 

보이지 않기에 더욱 깊은 땅속 어둠

뿌리에서 줄기와 가지 꽃잎에 이르기까지

먼 길을 걸어온 어여쁜 봄이

마침내 여기 앉아 있네

뼛속 깊이 춥다고 신음하며

죽어가는 이가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 하던

희디흰 봄 햇살도 꽃잎 속에 접혀 있네

해마다 첫사랑의 애틋함으로

제일 먼저 매화 끝에 피어나는 나의 봄

눈 속에 묻어두었던 이별의 슬픔도

문득 새가 되어 날아오네

꽃나무 앞에 서면

갈 곳 없는 바람도 따스하여라

살아갈수록 겨울은 길고

봄이 짧더라도 열심히 살 거란다

그래, 알고 있어 편하게만 살 순 없지

매화도 그렇게 말했단다

눈이 맑은 소꿉동무에게

오늘은 향기 나는 편지를 쓸까

매화는 기어이

보드라운 꽃술처럼 숨겨두려던

눈물 한 방울 내 가슴에 떨어뜨리네

 

신념 ,

세상에 넘지 못할 산도 없고 건너지 못할 바다도 없다

다만, 그 앞에서 신념이 없어 주저하기 때문에 두렵고 떨리고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