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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절, 김좌진 생가터에서
    2016. 2. 29. 22:32

     

     

    1889년 12월 16일(음력 11월 24일)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출생하였다.[4] 3살 때 아버지 김형규를 여의었으나 넉넉한 살림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일은 없었다. 하지만,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손가락질하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모친인 한산 이씨에 의해 엄하게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1904년 해주 오씨 오숙근과 혼인하였다. 1905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고 같은 해, 가노 해방 및 전답을 무상 분배한 뒤 1907년 호서(충청도) 지방을 밝게 한다는 즉 개화한다는 뜻인 호명학교를 설립하였다. 가산을 정리한 뒤 학교 운영에 충당하게 하고 90여 칸으로 된 자신의 집을 학교 교사로 제공했다. 홍성대한협회 지부와 기호흥학회를 조직하여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기호흥학회 장학재단을 설립하였고 한성신보 이사를 역임하였다. 안창호·이갑 등과 서북학회를 세우고 산하 교육기관으로 오성학교를 설립하여 교감을 역임하는 한편, 청년학우회 설립에도 협력하였다.

     

    1911년 북간도에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하여 자금조달차 돈의동에 사는 족질 김종근을 찾아간 것이 원인이 되어, 2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복역 중 김구와도 조우한다. 1913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한 김좌진은 “사나이가 실수하면 용납하기 어렵고 지사가 살려고 하면 다시 때를 기다려야 한다.”라는 시를 지었다.

     

    1917년 대한광복단을 조직하여 박상진 등과 활동하다 1918년 만주로 망명하면서 “칼 머리 바람에 센데 관산 달은 밝구나 칼끝에 서릿발 차가워 고국이 그립도다 삼천리 무궁화 동산에 왜적이 웬 말이냐 진정 내가 님의조국을 찾고야 말것이다.”라는 시를 지었다. 대한정의단에 합류한 군사부문 책임자가 되었고 동 단체를 군정부로 개편한 후 사령관으로 추천되었다. 한편, 1918년 박상진이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박상진을 구하기 위해 파옥계획을 세웠으나 실현은 하지 못했다.

     

    1918년 무오 독립선언에 서명하였다. 1919년 북로군정서 사단장과 사관연성소 소장을 겸임했다. 1920년 10월 21일 청산리 전투를 지휘하여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1921년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다. 1921년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자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5년 군사위원장 겸 사령관직 겸임한 신민부를 창건하였다. 또한 성동사관학교를 세워 부교장으로서 정예사관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정부국무위원으로 임명했으나, 취임하지 않고 독립군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1928년 한국유일독립당을 조직하였고 1929년 한족총연합회 주석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민족주의계열과 공산주의계열 간에 갈등이 격화되었고 1930년 1월 24일 고려공산청년회 회원 박상실에게 피살되었다. 김좌진은 사망하기 직전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란 말을 남겼다. 한족총연합회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그의 장례에 참석한 중국 사람들은 고려의 왕이 죽었다고 애도하였다.

     

    1933년 경성에 있던 부인 오숙근이 일제를 피해 만주로 다시 가서 상자에 김좌진의 유해를 위장하여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밀장한 뒤 1957년 김두한에 의해 지금의 장소로 이장되었다. 이듬해 사망한 부인 오숙근은 남편 김좌진과 함께 합장되었다.

     

    1947년 김좌진을 추모하는 추모회가 열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974년 보령시에서 김좌진의 성역화사업을 추진하고, 이와 동시에 그의 업적과 정신을 후세에 계승코자 매년 10월 22일에 행사가 개최되고 있다. 1999년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다

     

     어느 모임에 갔더니 그분이 말씀하셨다

    자기는 37년생인데 일제시대에는 일본 이름이었고, 해방 후 대한민국 이름을 다시 찿았다고,,,

    어쩌면 당연시 되지만,

    내 이름을 찿는것 조차 힘든 시기였다고,,,,

     홍성이 배출한 훌륭한 독립투사 중 한 분이신 백야 생가터에서 3.1절을 생각해본다

     쉽게 생각하기엔, 이런저런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스스로 머리가 숙여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버리는 것, 희생이 아닐까?

     

     

     

     

     

     

     생가지 !

     

     우리 부녀가 걸어온 발자국!

     

     눈 맞은 장독대!

     

     

     발자국,,,,

    나로 인해 누군가가 행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일까!!!

     풍경화 !

     장군의 성장기를 표현한 동상들,,,,

     

     백야사 전경!!

     홍살문의 붉은색은 액운을 방지한다고요,,,,,

     

     고즈넉합니다

     

     

     내린 눈이 한폭의 산수화!!!!

     

     

     누군가 행복할 필요가 있어서 장군은 자신을 이 땅에 버린걸까?

    남은 것은 무엇일까???

     젊은 연인도 왔네요

     

     

    백야 김좌진장군은 1889년(고종26) 선원 김상용의 12세손인 형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호방영민하고 용력이 뛰어났고, 18세 때 호명학교를 설립하여 인재양성과 신학문을 교육하기도 하였다. 광복단 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겪은 후 1917년 만주로 건너가 3·1운동의 전주곡이 되는 무오독립선언서에 39명의 민족지도자와 함께 서명하였다.

    1919년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총령관이 되었다. 그리고 사관연성소를 설치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고, 31세가 되던 해에 시베리아로 출전 중이던 일본군 3,000여 명을 화룡현 청산리로 유인하여 1,200여 명을 전상자로 만든 7일 간의 전투가 바로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금자탑을 이룬 1920년 10월 21일에 있었던 청산리 전투이다.

    1925년 김혁, 최호, 나중소 등과 함께 신민부를 조직하여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1929년 김종진, 이을규 등과 함께 한국총연합회를 조직하여 수석에 취임하여 재미동포의 교육과 민생에 주력하는 한편, 중국의 항일 세력과 연합하여 대일항전을 준비하던 중 1930년 1월24일(음 12월 25일) 북만주 중동선 산사역부근 정미소 앞에서 일제의 사주를 받은 박상실의 흉탄에 순절하였다.

    홍성군은 1991년부터 김좌진장군 생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생가와 문간채, 사랑채를 복원하고 관리사 및 전시관을 건립했다. 또한 김좌진장군 사당은 1998~2001년까지 성역화사업 추진으로 2,880평의 부지를 확보하여 내·외삼문, 재실, 주차장 등을 조성하였으며, 매년 10월에 김좌진장군의 청산리전투 전승기념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연보

    김좌진 연보
    1889. 11. 24(음) 홍주 고남하도면(高南下道面) 행재리(杏材理)(현 홍성군 갈살면(葛山面) 행상리(杏山里)에서 김형규(金衡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남.
    1892년(3세) 부친상을 당해 편모슬하에서 성장
    1897년(8세) 억강부약의 깃발아래 와룡천변에서 전쟁놀이
    1892년(3세) 부친상을 당해 편모슬하에서 성장
    1902년(13세) 형 경진(景鎭)이 김덕규(金德圭)의 양자가 되어 서울로 떠난 후 실질적인 가장으로서 집안 살림을 떠맡게 됨. 오숙근(吳淑根)과 결혼
    1905년(16세) 가노해방, 집안의 노비를 모아놓고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자신의 전답을 분배
    1907년(18세) 호명학교(湖明學校)설립에 참여 신교육운동 전개. 호명학교는 호서지역을 널리 밝게 한다는 뜻임. 서울 상경 윤치성, 노백린, 유동렬, 이갑등과 접촉 새로운 군사학을 배움
    1909년(20세)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홍주지회 가입 활동, 신민회 활동
    1910년(21세) 서울에 항일운동 근거지로 이창양행 설립, 신의주에는 염직회사차려 해외와 연락거점 삼음
    1911년(22세) 군자금 모금 활동 중 일경에 발각 체포 되어 6월 징역 2년형 선고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1913년(24세) 서대문형무소 출감, 홍주로 귀향
    1915년(26세) 군자금 모집ㆍ혁명기지 건설ㆍ친일부호 처단ㆍ무기구입ㆍ독립군 양성 등을 목적으로 조직된 비밀결사 조직인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 가입
    1917년(28세) 3월 대한광복회 군자금모집하다 체포되었으나 예심에서 면소판정으로 석방. 대한광복회 민주 부사령으로 만주에 파견됨. 이후 다음해 초에 대한광복회 조직이 일제에 의해 와해되고 만주로 파견되어 있어 체포는 면함
    1918년(29세) 해외독립운동가 39인이 서명한 무오독립선언서(일명 대한독립선언서) 서명 선포
    1919년(30세) 3월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 조직
    1919년(30세) 가을 서일(徐一)의 연합제의에 따라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에 참여. 대한군정서의 총재는 서일, 부총재는 현천묵이었으며 김좌진은 사령부의 총사령관으로 대한군정서의 군사부문을 전담
    1920년(31세) 2월초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十里坪)에 독립군 간부를 양성할 목적으로 한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를 설치. 사관연성소의 총책임은 사령관인 김좌진 교관으로는 이범석(李範奭)ㆍ김규식(金奎植) 등이 훈련을 담당
    1920년(31세)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전투, 천수평전투, 어랑촌전투, 맹개골전투, 만기구전투, 쉬구전투, 천보산전투, 고동하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패시키고 청산리대첩을 이룸
    1921년(32세) 북만지역에서 독립운동단체 통합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
    1922년(33세)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재결성 총사령에 취임
    1925년(36세) 북만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우동단체들과 통합을 추진하여하며 신민부를 조직, 총사령관 및 군사부위원장.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 부교 장으로 활동하며 독립군양성을 추진하고 총사령관으로서 보안대와 별동대를 자신의 휘하에 두고 무장투쟁을 전개
    1929년(40세) 7월에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결성
    1930년(41세) 음력 12월 24일 중동선 산시역(山市驛) 부근에 설치한 금성정미소에서 일제의 사주를 받은 고려공산당 천년회원인 박상실(朴尙實)이 쏜 흉탄을 맞고 순국
    1931. 2. 13(음) 사회장으로 산시역 칠가둔 북쪽 산에 안장
    1934. 4. 9(음) 부인 오숙근여사에 의해 유해를 고국으로 운구,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밀장
    1957. 1. 15(음) 오숙근여사가 사망하자 장군의 유해와 함께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산51번지에 합장
    1962. 3. 1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주요사적지

    "적막한 달밤 칼머리에 바람은 찬데 칼끝의 찬서리는 고국생각 돋는구나
    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웬일인고 더러운 세상 한 칼로 쓸어 버릴 길 없다."

    장군이 31세때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 가납연대를 섬멸시킬때의 무장한 위용으로 독립군 대장의 늠름한 기상이며, 비둘기상, 청산리 작전도, 단장지통 시가 조형되어 있다.

    • 소재지 : 남홍성군 홍성읍
    • 착수/완료 : 1979.5.8 ∼ 1983.5.31
    • 총사업비 : 10,100만원(국비:6,000만원, 도비:1,000만원, 군비:800만원, 성금및기타:2,300만원)
    • 시행주최 : 김좌진장군동상건립 추진위원회
    • 동상크기 : 높이5.2m, 가로3.3m
    • 좌대 : 높이3.8m, 지름3.5m
    • 하좌대 : 가로19.6m, 세로19.8m
    • 총높이 : 11.8m
    백야 김좌진장군 생가지
    백야 김좌진장군 생가지
    • 도지정 기념물 76호
    • 소재지 : 홍성군 갈산면 백야로 546-12

    백야 김좌진 장군이 태어나 성장하였던 곳으로 생가터에는 1991년부터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생가와 문간채, 사랑채를 복원하고 관리사 및 전시관을 건립하였다.

    백야 김좌진장군 추모비
    백야 김좌진장군 추모비
    • 도지정 문화재자료 167호
    • 소재지 : 홍성군 갈산면 백야로 546-12

    이 비는 항일운동과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김좌진 장군의 치적을 적은 비이다. 이 비는 1949년 대한 청년단 홍성군단의 성금으로 건립하였으며, 홍성읍 오관리 남산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백야 김좌진장군 묘역
    백야 김좌진장군 묘역
    • 지정별 : 지방기념물
    • 지정번호 : 제 73호
    • 소재지 :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 규모 : 총길이 900M, 높이 3.5M
    • 지정일 : 1984년 5월 17일

    대한 독립군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장군의 유해를 안장한 묘역이다. 1974년부터 보령시에서 장군묘역 성역화사업 추진, 업적과 독립정신을 후세에 계승코자, 청산리 대첩일을 추모 제향일로 정하고, 매년 10월22일 각계의 인사들이 모여 장군을 추모하고, 독립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출처: 홍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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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끝나는 곳에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