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변의 묘지 / 폴 발레리삶 2021. 8. 13. 06:34
해변의 묘지 / 폴 발레리
비둘기들 거니는 저 조용한 지붕이,
소나무들 사이, 무덤들 사이에 꿈틀거리고,
올바름인 정오가 거기서 불꽃들로
바다를 구성한다, 늘 되풀이되는 바다를 !
오, 신들의 고요에 오래 쏠린 시선은
한 가닥 명상 뒤의 고마운 보답 !
날카로운 번갯불들이 얼마나 순수한 작업이
잗다란 물거품의 숱한 금강석을 간직하고 있으며,
또 그래서 얼마나 아늑한 평화가 잉태되는 것만 같은가 !
하나의 해가 심연 위에 쉴 때는,
영구 원인의 두 가지 순수 작품,
시간은 반짝이고 꿈은 바로 앎이다.
단단한 보물, 조촐한 미네르바 신전,
고요의 더미, 눈에 띄는 푸짐한 저장,
우뚝 솟은 물, 불꽃 너울 쓰고도
그 많은 잠을 속에 간직한 눈이여,
오, 나의 침묵 ! 넋 속의 신전,
그러나 기왓장도 무수한 금빛 등마루, 지붕아 !
단 한번의 한숨애도 요약되는, 시간의 신전,
이 순수함에 나는 올라가 익숙해진다.
바다 두루 살펴보는 내 눈길에만 둘러싸여서,
그리고 바다의 잔잔한 반깍거림이
더할나위없는 경멸을 바다 깊이 씨뿌린다
신들에게 바치는 내 최고의 제물인 양.
과일이 즐거움 되어 녹아들듯이,
과일이 제 모습 죽어가는 입 안에서
자신의 없어짐을 환희로 바꾸듯이,
나도 여기서 미래의 내 연기를 들이마시고,
하늘은 웅성거리는 해변들의 변화를
타 없어진 넋에게 노래해 준다.
아름다운 하늘, 진짜 하늘아, 변하는 나를 바라보라,
나는 그 많은 자만 끝에, 이상야릇하면서도
능력 넘치는 그 많은 무위 끝에.
이 빛나는 공간에 몸을 내맡기고,
내 그림자는 죽은이 집들 위를 지나가며
제 허약한 발걸음에 나를 길들인다.
사정없는 화살들 지닌 빛의 놀라운 올바름,
하지점의 햇불을 쬐는 넋이여,
나는 버리고 서서 너를 쳐다본다 !
나는 너를 순수한 체 네 으뜸 자리로 돌려주니 ;
네 모습을 보라 ! --- 그러나 빛을 돌려주면
그림자의 어두운 반쪽도 따르게 마련,
오, 나만을 위해, 나 혼자서, 나 자신 속에서,
한 마음 곁에서, 시의 샘물들에서,
공백의 순수 결과 사이서,
나는 기다린다, 내 속에 있는 위대함의 메아리를,
늘 미래인 빈속을 넋 속에서 울리는,
쓰고 어둡고 소리 잘 내는 저수탱크를 !
잎가지들에 갇힌 듯한 가짜 포로,
이 앙상한 쇠올짱 갉아먹는 물굽이,
감겨진 내 눈 위의 눈부신 비밀들아,
아느냐, 어떤 육신이 제 게으른 종말로 나를 끌고가고,
어떤 이마가 이 뼈투성이 땅으로 육신을 끌어당기는가를 ?
불똥 하나가 거기서 내 부재자들을 생각한다.
막혀, 거룩하고, 물질 없는 불로 가득 차,
빛에게 바쳐진 땅 조각,
이곳이 나는 좋다, 횃불들이 지켜주고,
금빛과 돌과 침침한 나무들로 구성된 곳,
숱한 대리석이 숱한 망령들 위에 떨고 있는 이곳이 ;
충직한 바다가 여기서 잔다, 내 무덤들 위에서 !
눈부시게 빛나는 암캐야, 우상 숭배자를 피하라 !
목동의 미소 짓는 내가 외로이,
신비의 양들, 고요한 내 무덤들의 하얀 양떼를,
오랫동안 풀 뜯기고 있을 때는,
멀리하라, 조심성 많은 비둘기들을,
부질없는 꿈들과 호기심 많은 천사들을 !
여기에만 오면, 미래는 바로 게으름.
깔끔한 매미는 메마름을 긁어대고 ;
모두가 타고 허물어져, 공기 속에 흡수된다
나도 모를 무슨 가혹한 정기가 되어 ---
부재에 도취하면 삶은 한없이 드넓고,
쓴맛이 달고, 정신은 환히 맑다.
숨겨진 죽은이들은 바로 이 땅속에 있고
땅은 그들을 다시 데워 그들의 신비를 말린다.
저 높은 곳에서 정오가, 꼼짝도 않는 정오가
저 속에서 저를 생각하며 저 자신의 마음에 드니 ---
완전한 머리, 완벽한 왕관아,
나는 내 속에서 은밀한 변화일 따름.
네가 주는 겁을 당해낼 자는 나뿐 !
나의 뉘우침들, 나의 의혹들, 나의 얽매임들은
네 거창한 금강석의 흠집이고 ---
그런데도 나무 뿌리들 달린 흐리멍텅한 주민은,
대리석들로 온통 무거워진 자기네 어둠 속에서
이미 서서히 네 편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두꺼운 부채 속으로 녹아들었고,
붉은 찰흙이 하얀 종족을 마셔 버렸으며,
살아가는 재간은 꽃들 속으로 옮아 갔으니 !
죽은이들의 그 단골 말투들이며,
저마다의 솜씨, 남다른 마음씨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
눈물 맺히던 그곳에는 애벌레가 기어다닌다.
간지럼먹은 처녀들의 킬킬거림,
그 눈들이며 이빨들, 젖은 눈까풀들,
불꽃과 장난치는 귀여운 젖가슴,
순종하는 입술들에 반짝이는 피.
막바지 선물과 그걸 감싸는 손가락들,
모두가 땅밑으로 가서 윤회에 다시 끼어드니 !
큰 넋이여, 그래도 너는 바라겠는가
물결과 금빛이 여기서 육신의 눈앞에 빚어내는
이 거짓말 빛깔들도 이미 갖지 않을 그런 꿈을 ?
네가 안개가 될 때도 너는 노래할 생각인가 ?
자아 ! 모두가 도망친다 ! 나의 현존은 잔구멍투성이,
영생 바라는 거룩한 조바심 또한 죽어가니 !
금칠을 해도 검은 수척한 영생이여,
죽음을 어머니의 태로 삼는,
끔찍스럽게도 월계관 받쳐쓴 위안자여,
아름다운 거짓말과 경건한 속임수여 !
이 텅빈 머리통과 이 영원한 웃음을,
누가 몰라보고, 또 누가 마다하지 않으랴 !
그 숱한 삽질들의 흙 무게 아래서,
흙이 되어 우리의 발걸음도 분간 못하는,
깊은 곳의 조상들, 아무도 살지 않는 빈 머리들아,
정말로 좀먹는 자, 막무가내인 벌레는
묘석 아래서 잠자는 당신들 위한 것은 아니어서,
생명을 먹고살고, 나를 떠나지 않으니 !
어저면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인가, 아니면 미움인가 ?
그 숨은 이빨은 하도 바싹 내게 달라붙어 있어
어떤 이름으로 물러도 다 알맞을 수 있을 판 !
상관없어 ! 벌레는 보고, 바라고, 꿈꾸고, 만지고 !
내 육신이 제 마음에 드니, 내 잠자리 위에서까지도,
나는 이 생물에 딸려서 살고 있는 걸 !
제논 ! 잔인한 제논 ! 엘레아의 제논이여 !
날면서도 날아가지 않는 그 바르르 떠는
날개돋친 화살로 너는 나를 꿰뜷었어 !
그 소리는 나를 낳고 화살은 나를 죽이니 !
아 ! 태양은 --- 성큼성큼 달려도 꼼작않는 아킬레스인
이 넋에게는 이 무슨 거북의 그림자인가 !
아니야, 천만에 ! --- 일어서라 ! 잇닿은 시대 속에 !
내 육신아, 생각에 잠긴 이 형태를 깨뜨려라 !
내 가슴아, 태어나는 바람을 들이마셔라 !바다가 내뿜는 시원한 기운 한 가닥이,
내 넋을 네게 돌려주니 --- 오, 짭짤한 힘이여 !
물결로 달려가 거기서 힘차게 솟구쳐오르자 !
그럼 ! 광란을 타고난 큰 바다,
얼룩덜룩한 표범 털가죽과
태양의 무수한 영상들로 구멍난 망토여,
침묵과도 비슷한 야단법석 속에서
번쩍이는 네 꼬리를 자꾸 물어뜯으며,
네 시퍼런 살에 도취해, 날뛰는 히드라여.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거대한 대기는 내 책을 폈다 또 다시 접는다,
박살난 물결이 바위들로부터 마구 용솟음치니 !
날아올라라, 온통 눈이 부셔 어지러워진 책장들아 !
부수거라, 물결들아 ! 흥에 겨운 물로 부수어라
삼각돛들이 모이 쪼던 저 조용한 지붕을 !
발레리 [Valéry, (Ambroise-)Paul(-Toussaint-Jules), 1871.10.30~1945.7.20]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거대한 대기는 내 책을 폈다 또 다시 접는다,
---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닷가 우체국 / 안도현 (11) 2021.08.29 가슴으로 느끼는 가을 / 김윤진 (2) 2021.08.19 꿈과 상처 / 김승희 (9) 2021.08.12 가을 우체국 앞에서 (6) 2021.08.07 가을의 풍경화 / 문병란 (5) 2021.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