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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의 숨결을 품은 수덕사, 덕숭산 여행
    2017. 10. 12. 19:16

    추석 연휴에 다녀온 수덕사와 덕숭산 입니다

    가을빛이 내렸습니다

     

     

     

     

    잠시 선박물관에 들려서 작품도 봅니다

    남는게 시간인 날,,,,!

     

    추석 연휴라서 인적도 한산합니다

     

     

     

     

     

    초당에도 가을이 왔습니다

     

     

     

     

    저 거리의 암자 / 신달자

    어둠 깊어가는 수서역 부근에는
    트럭 한 대 분의 하루 노동을 벗기 위해
    포장마차에 몸을 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인과 손님이 함께
    출렁출렁 야간여행을 떠납니다
    밤에서 밤까지 주황색 마차는
    잡다한 번뇌를 싣고 내리고
    구슬픈 노래를 잔마다 채우고
    빗된 농담도 잔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속풀이 국물이 짜글짜글 냄비에서 끓고 있습니다
    거리의 어둠이 짙을수록
    진탕으로 울화가 짙은 사내들이
    해고된 직장을 마시고 단칸방의 갈증을 마십니다
    젓가락으로 집던 산낙지가 꿈틀 상 위에 떨어져
    온몸으로 문자를 쓰지만 아무도 읽어내지 못합니다
    답답한 것이 산낙지뿐입니까
    어쩌다 생의 절반을 속임수에 팔아버린 여자도
    서울을 통째로 마시다가 속이 뒤집혀 욕을 게워냅니다
    비워진 소주병이 놓인 플라스틱 작은 상이 휘청거립니다
    마음도 다리도 휘청거리는 밤거리에서
    조금씩 비워지는
    잘 익은 감빛 포장마차는 한 채의 묵묵한 암자입니다
    새벽이 오면
    포장마차 주인은 밤새 지은 암자를 걷워냅니다
    손님이나 주인 모두 하룻밤의 수행이 끝났습니다
    잠을 설치며 속을 졸이던 대모산의 조바심도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거리의 암자를 가슴으로 옮기는데
    속을 후려치는 하룻밤이 걸렸습니다
    금강경 한 페이지가 겨우 넘어갑니다

     

    전설


    백제시대에 창건된 수덕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람은 극히 퇴락이 심해 대중창불사를 하여야 했으나 당시의 스님들은 불사금을 조달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묘령의 여인이 찾아와서 불사를 돕기 위해 공양주를 하겠다고 자청하였다. 이 여인의 미모가 빼어난 지라 수덕각시라는 이름으로 소문이 원근에 퍼지게 되니, 이 여인을 구경하러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중 신라의 대부호요 재상의 아들인 '정혜(定慧)'라는 사람이 청혼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불사가 원만성취되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여인의 말을 듣고 이 청년은 가산을 보태어 10년 걸릴 불사를 3년만에 원만히 끝내고 낙성식을 보게 되었다. 낙성식에 대공덕주로서 참석한 이 청년이 수덕각시에게 같이 떠날 것을 독촉하자 '구정물 묻은 옷을 갈아 입을 말미를 주소서'하고 옆방으로 들어간 뒤 기척이 없었다. 이에 청년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하자 여인은 급히 다른 방으로 사라지려 하였다. 그 모습에 당황한 청년이 여인을 잡으려하는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짝만 남기고 사라지니, 갑자기 사람도 방문도 없어지고 크게 틈이 벌어진 바위 하나만 나타나 있었다. 이후 그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는 봄이면 기이하게 버선모양의 버선꽃이 지금까지 피고 있으며 그로부터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이 수덕이었으므로 절이름을 수덕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여인을 사랑한 정혜라는 청년은 인생 무상함을 느끼고 산마루에 올라가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정혜사라 하였다고 한다.

     

    박무가 끼어서 조망은 좋지 않습니다

     

     

     

    정혜사 해우소,,,!

     

     

     

     

     

    고요한 공부방 !

     

     

     

     

     

    〔 수덕사 〕

     

    서해를 향한 차령산맥의 낙맥(落脈)이 만들어 낸 덕숭산(德崇山)은 북으로는 가야산(伽倻山), 서로는 오서산, 동남간에는 용봉산(龍鳳山)이 병풍처럼 둘러쌓인 중심부에 서 있다. 이 덕숭산 자락에 많은 고승들을 배출한 한국불교의 선지종찰(禪之宗刹) 수덕사가 자리하고 있다. "백제는 승려와 절과 탑이 많다"라고 중국사서(史書)인 '북사(北史)' , '수서(隨書)', '주서(周書)'에 기록되어 있다. 그 문헌에 나타난 백제 사찰로는 흥륜사(興輪寺), 왕흥사(王興寺), 칠악사(漆岳寺), 수덕사(修德寺), 사자사(師子寺), 미륵사(彌勒寺), 제석 정사(帝釋精寺) 등 12개가 전하지만 현재까지 큰 규모를 유지하고 있는 사찰은 수덕사 뿐이다. 백제사찰인 수덕사의 창건에 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나,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백제 위덕왕(威德王, 554~597) 재위 시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수덕사 경내 옛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와당은 백제시대 창건설을 방증할 수 있는 자료이다. 수덕사의 고려시대 유물로는 충렬왕 34년(1308)에 건축된 대웅전과 통일신라 말기 양식을 모방한 삼층석탑, 수덕사 출토 고려자기, 수덕사 출토 와당 등 있다. 임진왜란으로 대부분의 가람이 소실되었으나 수덕사 대웅전은 다행히 옛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1937~40년 보수 당시 발견된 대웅전 동측 내부 전면에 기록된 단청개칠기 (丹靑改漆記)에 의하면 중종 23년(1528)에 대웅전 색채보수, 영조 27년(1751), 영조 46년(1770)에 대웅전 보수, 순조 3년(1803)에 대웅전 후면의 부연보수와 풍판의 개수 등 4차례 대웅전 보수가 있었음을 알수 있다. 1673년 조성된 수덕사 괘불과 18세기 제작된 수덕사 소종은 조선후기 수덕사의 꾸준한 불사활동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 주요문화재 : 수덕사대웅전(국보 제49호) 수덕사3층석탑(지방유형문화재 103호) 수덕사7층석탑 육괴정, 황하루, 근역성보관, 사리탑 외

     

     

    나를 위한 변명을 멈추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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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끝나는 곳에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