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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법어(法語) / 장석주
태풍 나비 지나간 뒤 쪽빛 하늘이다
푸새 것들 몸에 누른빛이 든다
여문 봉숭아씨방 터져 흩어지듯
뿔뿔이 나는 새떼를
황토 뭉개진 듯 붉은 하늘이 삼킨다
대추열매에 붉은빛 돋고
울안 저녁 푸른빛 속에서
늙은 은행나무는 샛노란 황금비늘을 떨군다
쇠죽가마에 괸 가을비는
푸른빛 머금은 채 찰랑찰랑 투명한데
그 위에 가랑잎들 떠 있다
몸 뉘일 위도에
완연한 가을이구나
어두워진 뒤 오래 불 없이 앉아
앞산 쳐다보다가
달의 조도(照度)를 조금 더 올리고
풀벌레의 볼륨은 키운다
복사뼈 위 살가죽이 자꾸 마른다
가을이
저 몸의 안쪽으로 깊어지나 보다
상사화와 우주론 / 박남준
크고 높고
화려한 것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다
세상의 조화로움에 다 쓰임이 있는 것이다
태양과 행성과 거기 위성이 존재하며
별들의 우주가 반짝이듯이
어제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 솟아오른 것들
이 삼복 더위에
꽃과 잎이 끝내 이름처럼 만날 수 없는
숙명이라지만
때가 되어 이윽고 꽃대를 밀어 올리는
묵묵하고 꿋꿋한 생의 자세
이토록 비상하는 일상이 따로 있을까
눈 들어보면, 귀 기울여보면,
그대 안에, 그대의 문 밖에
내 안에, 내 마음의 멀고 가까운 눈앞
펼쳐져 있는
저 저~
"꽃들이 휘청거린다. 상사화꽃은 이제 지고 없다. 사진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기억인 셈이다. 그 기억을 꺼내보는 추억의 풍경인 것이다."
단풍이 흘러가는 길을 따라 찾아간 시인의 거처. 모악산방에 시인은 보이지 않고, 악양에서 보내온 가을편지가 구절초 마냥 쓸쓸하다. 섬진강 줄기 따라 지리산자락에 여장을 풀었을 박남준 시인의 길을 따라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 (문학동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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