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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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 이태수산 2020. 8. 30. 19:23
눈 / 이태수 눈은 하늘이 내리는 게 아니라 침묵의 한가운데서 미끄러져 내리는 것 같다 스스로 그 희디흰 결을 따라 땅으로 내려온다 새들이 그 눈부신 살결에 이따금 희디흰 노랫소리를 끼얹는다 신기하게도 새들의 노래는 마치 침묵이 남은 소리들을 흔들어 펼치듯이 쉽게 빚어내는 운율 같다 침묵에 바치는 성스러운 기도 소리 같다 사람들이 몇몇 그 풍경 속에 들어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 먼 데를 바라본다 그 시간의 갈라진 틈으로 불쑥 빠져나온 듯한 아이들이 몇몇 눈송이를 뭉처 서로에게 던져대고 있다 하지만 눈에 점령당한 한동안은 사람들의 말도 침묵의 눈으로 뒤덮이는 것 같아 아마도 눈은 눈에 보이는 침묵, 세상도 한동안 그 성스러운 가장자리가 되는 것만 같다 밖에 못나가고 있으려니 답답합니다 시원한 겨울 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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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강변 / 신동호산 2018. 6. 21. 09:39
봄날 강변 / 신동호 세월이 멈춰졌으면 하지 가끔은 멈춰진 세월 속에 풍경처럼 머물렀으면 하지 문득 세상이 생각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느꼈을 때일거야 세상에는 생각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많다는 것을 느꼈을 때일 거야 아마 예전에 미처 감지하지 못해서가 아니야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면 또다시 아름다움을 느끼기엔 너무나 빠른 세월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야 분명 마음은 발걸음보다 항상 뒤처져 걷지만 봄날 강변에 앉아보면 알게 되지 머얼리 기차가 지나갈 때 눈부신 햇살 아래, 오래 전 정지된 세월의 자신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순간 기차는 굴속으로 사라져버리고 강변의 아름다움으로부터 자신은 떠나지만 변하지 않는 풍경으로 남아 있을 게야 마음의 지조처럼 여전히 기다릴 게야 오래도록. 지난 6일에 다녀온 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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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위하여 / 문근영산 2018. 2. 25. 20:59
우리를 위하여 / 문근영 사는 일이 자글자글하고 질퍽거릴 땐 아득한 시간의 경계를 지우고 노심초사 꼭꼭 눌러둔 사연 데리고 무작정 길을 떠나자 불가항력의 벽 앞에서 말로 풀어내지 못한 생각의 편린들도 치명적이었던 증오도 깡그리 지우고, 잘린 시간이 어둠에 잠기어 그리움이 하나씩 제자리로 돌아오는 세월의 길목, 뒤따라온 세월의 바람이 허공을 갉으며 흔들리면 안일하게 잊고 지냈던 잃어버린 우리가 뜨겁게 돋아 화끈거린다지울 수 없는 우리, 지금은 우리를 위하여 얼룩진 긴장을 풀고 무엇인가 하여야 할 때 서툰 밤길 같은 인생에서 서로 길이 되어 환해져 오는 길이 되어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렇게 함께 늙어 갈 수 있도록 떠날 수 있음을 감사하며, 살아 있음을 감사합니다 무엇이 남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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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는 한라산, 영실 산행(2)산 2016. 3. 12. 21:49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 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 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