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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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게 안부를 묻다 / 류시화삶 2014. 12. 5. 19:37
슬픔에게 안부를 묻다 / 류시화 너였구나 나무 뒤에 숨어 있던 것이 인기척에 부스럭거려서 여우처럼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이 슬픔, 너였구나 나는 이 길을 조용히 지나가려 했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 이 겨울숲을 떠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를 깨우고 말았구나 내가 탄 말도 놀라서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숲 사이 작은 강물도 울음을 죽이고 잎들은 낮은 곳으로 모인다 여기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또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한때 이곳에 울려퍼지던 메아리의 주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무들 사이를 오가는 흰새의 날개들 같던 그 눈부심은 박수치며 날아오르던 그 세월들은 너였구나 이 길 처음부터 나를 따라오던 것이 서리 묻은 나뭇가지를 흔들어 까마귀처럼 놀라게 하는 것이 너였구나 나는 그냥 지나가려 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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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 류시화산 2014. 12. 2. 09:55
나무 / 류시화 나에게 나무가 하나 있었다 나는 그 나무에게로 가서 등을 기대고 서 있곤 했다 내가 나무여 하고 부르면 나무는 그 잎들을 은빛으로 반짝여 주고, 하늘을 보고 싶다고 하면 나무는 저의 품을 열어 하늘을 보여 주었다 저녁에 내가 몸이 아플 때면 새들을 불러 크게 울어 주었다 내 집 뒤에 나무가 하나 있었다 비가 내리면 서둘러 넓은 잎을 꺼내 비를 가려 주고 세상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로도 다가오지 않을 때 그 바람으로 숨으로 나무는 먼저 한숨지어 주었다 내가 차마 나를 버리지 못할 때면 나무는 저의 잎을 버려 버림의 의미를 알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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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슬픔의 만다라 / 류시화삶 2014. 12. 1. 21:53
사랑과 슬픔의 만다라 / 류시화 너는 내 최초의 현주소 늙은 우편 배달부가 두들기는 첫번째 집 시작 노트의 첫장에 시의 첫문장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나의 시는 너를 위한 것 다른 사람들은 너를 너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는 너를 너라고 부르지 않는다 너는 내 마음 너는 내 입 안에서 밤을 지샌 혀 너는 내 안의 수많은 나 정오의 슬픔 위에 새들이 찧어대는 입방아 위에 너의 손을 얹어다오 물고기처럼 달아나기만 하는 생 위에 고독한 내 눈썹 위에 너의 손을 얹어다오 나는 너에게로 가서 죽으리라 내가 그걸 원하니까 나는 늙음으로 생을 마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바닷새처럼 해변의 모래 구멍에서 고뇌의 생각들을 파먹고 싶지는 않으니까 아니다 그것이 아니다 내가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내가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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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잎/류시화농부이야기 2014. 11. 3. 20:27
붉은 잎 / 류시화 그리고는 하루가 얼마나 길고 덧없는지를 느끼지 않아도 좋을 그 다음 날이 왔고 그 날은 오래 잊혀지지 않았다. 붉은 잎, 붉은 잎 하늘에 떠가는 붉은 잎들 모든 흐름이 나와 더불어 움직여 가고 또 갑자기 멈춘다 여기 이 구름들과 끝이 없는 넓은 강물들 어떤 섬세하고 불타는 삶을 나는 가지려고 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졌었다. 그렇다, 다만 그것들은 얼마나 하찮았던가! 여기 이 붉은 잎, 붉은 잎들 허공에 떠 가는 더 많은 붉은 잎들 바람도 자고 물도 맑은 날에 나의 외로움이 구름들을 끌어당기는 곳 그것들은 멀리 있다, 더 멀리에 그리고 때로는 걷잡을 수 없는 흐름이 그것들을 겨울하늘 위에 소용돌이치게 하고 순식간에 차가운 얼음 위로 끌어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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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에게 바치는 이력서 / 류시화삶 2014. 9. 29. 01:22
태양에게 바치는 이력서 / 류시화 1 나 태양에게 고백할 것이 있네 한때 나는 최고의 시인을 꿈꾸었으나 화살을 맞은 독수리 처럼 추락하였다 시인이 될 권리를 갖고 태어나 열 살부터 다락방에서 홀로 우주를 꿈꾸었으나 구름들이 몰려와 내 둥지를 감춰 버렸다 그리하여 나 삼류 시인처럼 거리를 헤매며 수년간 시를 잊고 살았다. 누군가 세상의 등록 장부에서 내 이름 석자를 지워 버렸다 2 나 태어나는 날 태양은 일식을 시작하고 꼬리가 여러개인 별똥별이 날아 와 점치는 여자의 눈에 박혀 버렸다 눈 먼 여자의 예언에 의할 것 같으면 내 삶을 지배하는 것은 어둠이었다 태양이여, 내 눈을 멀게 하렴 꿈꾸어선 안 될 것들을 꿈꾸지 않도록 내 눈이 본 것과 보게 될 것들을 그리워 하지 않도록 태양이여, 내 눈에게 말하렴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