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
-
삶을 살아낸다는 건 / 황동규삶 2023. 12. 27. 09:09
삶을 살아낸다는 건 / 황동규 다 왔다. 동녘 하늘이 자잔히 잿빛으로 바뀌기 시작한 아파트 동과 동 사이로 마지막 잎들이 지고 있다, 허투루루. 바람이 지나가다 말고 투덜거린다. 엘리베이터 같이 쓰는 이웃이 걸음 멈추고 같이 투덜대다 말고 인사를 한다. 조그만 인사, 서로가 살갑다. 얇은 서리 가운 입던 꽃들 사라지고 땅에 꽂아논 철사 같은 장미 줄기들 사이로 낙엽은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밟히면 먼저 떨어진 것일수록 소리가 엷어진다. 아직 햇빛이 닿아 있는 피라칸사 열매는 더 붉어지고 하나하나 눈인사하듯 똑똑해졌다. 더 똑똑해지면 사라지리라. 사라지리라, 사라지리라 이 가을의 모든 것이, 시각을 떠나 청각에서 걸러지며. 두터운 잎을 두르고 있던 나무 몇이 가랑가랑 마른기침 소리로 나타나 속에 감추었던 가지..
-
사랑의 이율배반 / 이정하삶 2023. 12. 25. 14:12
사랑의 이율배반 / 이정하 그대여 손을 흔들지 마라.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떠나는 사람은 아무 때나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겠지만 남아 있는 사람은 무언가 무작정 기다려야만 하는가. 기약도 없이 떠나려면 손을 흔들지 마라. 사는 곳에 계속 폭설이 내렸습니다 오늘은 푹한 날씨에 길도 좀 녹아내립니다 푸른 색감이 그립습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몇 년만에 맞이합니다 전쟁,질병, 가난, 기아 등 등으로 고통받는 이웃이 없기를 소망합니다 재벌들도 소천하시면 한 줌의 재가 되어 가는 것을 봅니다 생명이 살아있는 동안에 ,,, 영화 레미제라불의 명대사를 되뇌어 봅니다 인생은 소유가 아니라 나누어 주는 것 입니다
-
긍정의 힘 / 선미숙산 2023. 7. 30. 07:24
긍정의 힘 / 선미숙 언제부턴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틀림없는 건 이게 나를 살게 한다는 거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싶게 죽을 만큼 힘든 일을 겪을 때도 나는 죽지 않았다. 세상에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배신을 당했을 때도 원망보다는 세상 배움으로 여겼다. 당장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막막할 때도 한 가지 놓지 않은 건 꿈이었다. 내 상표를 갖는 꿈 온 세상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엉뚱하게도 나는 잠깐 덮어두었던 그 꿈을 끄집어냈다. 꼬박 사흘을 매달렸다. 그 집중력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른다. 나한테 그런 힘이 있는 줄 스스로 새삼 놀랐다. 누구에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했다. 그리고 열 달 뒤, 드디어 특허청에 내가 만든 상표 두 개를 올렸고 오랫동안 품고 있던 꿈을..
-
내가 원하던 삶을 살고 있지 않더라도 / 도종환삶 2023. 7. 17. 17:33
내가 원하던 삶을 살고 있지 않더라도 / 도종환 꽃나무라고 늘 꽃 달고 있는 건 아니다. 삼백예순닷새 중 꽃 피우고 있는 날보다 빈 가지로 있는 날이 훨씬 더 많다. 행운목처럼 한 생에 겨우 몇번 꽃을 피우는 것들도 있다. 겨울 안개를 들판 끝으로 쓸러내는 나무들을 바라보다 나무는 빈 가지만으로도 아름답고 나무 그 자체로 존귀한 것임을 생각한다. 우리가 가까운 숲처럼 벗이 되어주고 먼 산처럼 배경 되어주면 꽃 다시 피고 잎 무성해지겠지만 꼭 그런 가능성만으로 나무를 사랑하는게 아니라 빈 몸 빈 줄기만으로도 나무는 아름다운 것이다. 혼자만 버림받은 듯 바람 앞에 섰다고 엄살떨지 않고 꽃 피던 날의 기억으로 허세부리지 않고 담담할 수 있어서 담백할 수 있어서 나무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이다. 꽃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