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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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맛집, 간월암삶 2022. 3. 2. 19:43
노 을 / 기형도 하루 종일 지친 몸으로만 떠돌다가 땅에 떨어져 죽지 못한 햇빛들은 줄지어 어디로 가는 걸까 웅성웅성 가장 근심스런 색깔로 西行(서행)하며 이미 어둠이 깔리는 燒却場(소각장)으로 몰려들어 몇 점 폐휴지로 타들어가는 午後 6시의 참혹한 刑量(형량) 단 한 번 후회도 용서하지 않는 무서운 時間(시간) 바람은 긴 채찍을 휘둘러 살아서 빛나는 온갖 象徵(상징)을 몰아내고 있다. 都市(도시)는 곧 活字(활자)들이 일제히 빠져 달아나 速度(속도) 없이 페이지를 펄럭이는 텅 빈 한 권 冊(책)이 되리라. 勝負(승부)를 알 수 없는 하루와의 싸움에서 우리는 패배했을까. 오늘도 물어보는 사소한 물음은 그러나 우리의 일생을 텅텅 흔드는 것. 午後(오후) 6時(시)의 소각장 위로 말없이 검은 연기가 우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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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기형도산 2014. 2. 27. 23:03
안개/ 기형도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군단(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 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 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 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