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추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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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는/최영미산 2017. 8. 29. 18:18
가을에는/최영미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 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수수) (부추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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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이 오면/안도현농부이야기 2015. 9. 1. 09:51
9월이 오면/안도현 그대 9월이 오면 9월의 강가에 나가 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는지요 뒤따르는 강물이 앞서가는 강물에게 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밀어주면 앞서가는 강물이 알았다는 듯 한번 더 몸을 뒤척이며 물결로 출렁 걸음을 옮기는 것을 그때 강둑 위로 지아비가 끌고 지어미가 미는 손수레가 저무는 인간의 마음을 향해 가는 것을 그대 9월의 강가에서 생각하는지요 강물이 저희끼리만 속삭이며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젖은 손이 닿는 곳마다 골고루 숨결을 나누어 주는 것을 그리하여 들꽃들이 피어나 가을이 아름다워지고 우리 사랑도 강물처럼 익어가는 것을 그대 사랑이란 어찌 우리 둘만의 사랑이겠는지요 그대가 바라보는 강물이 9월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고 가듯이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몸을 부비며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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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농부이야기 2013. 9. 14. 08:18
아침이 왔다, 사랑하는이들이 긴 밤에서 깨어났다 창문에 커튼들이 벗겨지고, 아침을 맞는다 지친 눈과 고뇌의 얼굴이 아니라, 행복에 겨운 표정으로,,, 비가 내린다 지난 밤의 절망에 잠긴 영혼들을 쉬게 하려는가 보다 평화로운 마을이 빗소리에 깨어난다 오늘은, 찬란함이 아니라도, 나뭇가지에 흔들림처럼 작은 행복으로 오소서 조용히 이 아침을 깨어나게 하소서 사랑하는 이여! 마을을 다 털어놓고 나니 알 수 있었다 세상과 나를 움직이는 게 무엇인지 보였다 세상을 향한, 여러분을 향한, 그리고 자신을 향한 내 마음 가장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도 또렷하게 보였다 그건, 사랑이었다 (한비야의 글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