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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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서 / 이해인삶 2023. 1. 11. 19:52
바닷가에서 / 이해인 오늘은 맨발로 바닷가를 거닐었습니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한번은 하느님의 통곡으로 한번은 당신의 울음으로 들렸습니다 삶이 피곤하고 기댈 데가 없는 섬이라고 우리가 한 번씩 푸념할 적마다 쓸쓸함의 해초도 더 깊이 자라는 걸 보았습니다 밀물이 들어오며 하는 말 감당 못할 열정으로 삶을 끌어안아보십시오 썰물이 나가면서 하는 말 놓아버릴 욕심들은 미루지 말고 버리십시오 바다가 모래 위에 엎질러놓은 많은 말을 다 전할 순 없어도 마음에 출렁이는 푸른 그리움을 당신께 선물로 드릴께요 언젠가는 우리 모두 슬픔이 없는 바닷가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로 춤추는 물새로 만나는 꿈을 꾸며 큰 바다를 번쩍 들고 왔습니다 희망이 넝쿨처럼 자라서 벽을 덮고, 집을 덮는 담쟁이처럼 힘이 되는 저녁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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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개구이집에서 / 이정록삶 2023. 1. 10. 22:01
조개구이집에서 / 이정록 빙판길이든 눈 녹은 진창길이든 조개껍데기가 그만인겨. 조개란 것이 억만 물결로 이엉을 얹었는디 같잖게 사람이나 자빠뜨리겄남? 죽으면 썩어 웂어질 몸뚱어리, 조개껍데기처럼 바숴질 때까지 가야되잖겄어? 나이 사십 중반이면 막장은 거짐 빠져나온겨. 피조개 빨던 입이라고 사랑하지 말란 법 있간디? 연탄 한 장 배 맞추는 것도, 연탄집게처럼 한꺼번에 불구녕에 들어가야 되는겨. 자네 하날 믿고 물 건너 왔는디 하루하루 얼매나 섧고 폭폭허겄나? 요번엔 뗏장이불 덮을 때까지 가보란 말이여. 관자 기둥까지 다 내어주는 조개처럼 몸과 맘을 죄다 바치란 말이여. 사랑도 조개구이 같은겨. 내리 불길만 쏴붙이다간 칼집 안 낸 군밤처럼 거품 물다가 팍 터져 뛰쳐나간단 말이지. 조개는 혓바닥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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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여 당신은 / 이해인삶 2022. 12. 25. 18:17
바다여 당신은 / 이해인 내가 목놓아 울고 싶은 건 가슴을 뒤흔들고 가버린 거센 파도 때문이 아니다 한 밤을 보채고도 끊이지 않는 목쉰 바람소리 탓도 아니다 스스로의 어둠을 울다 밫을 잃어버린 사랑의 어둠 죄스럽게 비좁은 나의 가슴을 커다란 웃음으로 용서하는 바다여 저 안개 덮인 산에서 어둠을 걷고 오늘도 나이게 노래를 다오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는 나에게 노래를 다오 언젠가는 모두가 쓸쓸히 부서져 갈 한 잎 외로운 혼임을 바다여 당신은 알고 있는가 영원한 메아리처럼 맑은 여운 어느 파안 끝에선가 종이 울고 있다 어제와 오늘 사이를 가로 누워 한번도 말이 없는 묵묵한 바다여 잊어서는 아니될 하나의 노래를 내게 다오 당신의 넓은 길로 걸어가면 나는 이미 슬픔을 잊은 행복한 작은 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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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시간을 곶고 / 문정희삶 2022. 6. 11. 01:53
바다에 시간을 곶고 / 문정희 시간은 뙤약볕처럼 날카로웠다 두럽고 아슬아슬하게 맨 살 위에 장대를 꽂기도 했다 그래서 삶은 때때로 전쟁을 연상시켰다 하늘아래 허리를 구부리는 것은 굴욕이 아니다 이 빗발치듯 내려꽂히는 시간 속에 허리를 구부리고, 서로 이마를 맞대고 생명과 생명은 이어져왔다 바다가 밀려오고, 밀려나가고 또 가을이 오고, 봄이 오고 그러므로 우리가 허리를 구부려 줍는 것은 차라리 영원한 허기인지도 모른다 허기가 바다를 다시 채운다 허기가 지상에 가을을 불러온다 마치 병정들처럼 시간이 맨살 위로 장대를 들고 다가드는 시간 문득 발아래 깔리는 무수한 별들을 본다 이른 새벽 길을 나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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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묘지 / 폴 발레리삶 2021. 8. 13. 06:34
해변의 묘지 / 폴 발레리 비둘기들 거니는 저 조용한 지붕이, 소나무들 사이, 무덤들 사이에 꿈틀거리고, 올바름인 정오가 거기서 불꽃들로 바다를 구성한다, 늘 되풀이되는 바다를 ! 오, 신들의 고요에 오래 쏠린 시선은 한 가닥 명상 뒤의 고마운 보답 ! 날카로운 번갯불들이 얼마나 순수한 작업이 잗다란 물거품의 숱한 금강석을 간직하고 있으며, 또 그래서 얼마나 아늑한 평화가 잉태되는 것만 같은가 ! 하나의 해가 심연 위에 쉴 때는, 영구 원인의 두 가지 순수 작품, 시간은 반짝이고 꿈은 바로 앎이다. 단단한 보물, 조촐한 미네르바 신전, 고요의 더미, 눈에 띄는 푸짐한 저장, 우뚝 솟은 물, 불꽃 너울 쓰고도 그 많은 잠을 속에 간직한 눈이여, 오, 나의 침묵 ! 넋 속의 신전, 그러나 기왓장도 무수한 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