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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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기도 / 이문재삶 2021. 1. 18. 18:01
오래된 기도 / 이문재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 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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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날의 연가 / 고정희삶 2020. 12. 7. 08:21
쓸쓸한 날의 연가 / 고정희 내 흉곽에 외로움의 지도 한 장 그리는 날이면 나는 그대에게 편지를 쓰네 봄 여름 가을 겨울 편지를 쓰네 갈비뼈에 철썩이는 그리움으로 그대 간절하다 새벽 편지를 쓰고 허파에 숭숭한 외로움으로는 그대 그립다 안부 편지를 쓰고 간에 들고 나는 외로움으로는 그대 기다린다 저녁 편지를 쓰며 때론 비유법으로 혹은 직설법으로 그대 사랑해 꽃도장을 찍은 뒤 나는 그대에게 편지를 부치며 비오는 날은 비오는 소리 편에 바람 부는 날은 바람 부는 소리, 편에 아침에 부치고 저녁에도 부치며 아아 그때마다 누가 보냈을까 이 세상 지나가는 기차표 한 장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네 슬픔이 가라앉는 날도 찬바람 부는 바다에 가면 더, 시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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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年(중년) / 김광규삶 2020. 11. 30. 21:17
中 年(중년) / 김광규 낯선 도시에서 술 취한 저녁 부동산 업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쫓아오며 경적을 울렸다 나는 모른 척 걸어갔다 주유소 앞을 지나 비탈길을 자갈이 깔린 비탈길을 비틀대며 걸었던 것이다 어두운 피해 어느 사진관 입구 불빛 앞에 섰을 때 나는 안으로 들어갈 마지막 기회를 잃었다 그리하여 밤새도록 술 마시고 웩웩 토하고 해장국집을 나섰을 때 밤을 새운 가로등은 피곤해 보였고 부지런한 행인들은 더욱 낯설었다 냉수를 마시고 손을 씻고 어딘가 여름 풀밭에 누워 나도 여유 있는 웃음을 웃고 싶었다 이제 달력이 한 장 남았습니다 2020년 모두가 힘든 해였습니다 그래도 꽃이 지면 까만 씨앗이 남듯이 삶은 더욱 단단해졌을 듯,,,, 12월 멋진 꿈 마무리 하시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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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포에서 장풍 날리기 ㅋㅋ삶 2020. 2. 2. 20:08
눈 내리는 바닷가로/ 이해인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가장 순결한 마음으로 부르고 싶으면 눈 내리는 바닷가로 오십시오 가슴에 깊이 묻어둔 어떤 슬픔 하나 아직도 소리 내어 울지 못했으면 눈 내리는 바닷가로 오십시오 차가운 눈을 맞고 바다는 더욱 고요하고 따뜻해졌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을 위해서는 하얀 웃음을 죽은 이들을 위해서는 하얀 눈물을 피우며 송이송이 바다에서 꽃이 되는 눈 어느 날 문득 흰 옷 입은 천사의 노래를 듣고 싶거든 눈 내리는 바닷가로 오십시요 아주 오랫만에 가족들과 바닷가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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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편지/ 김현태삶 2020. 1. 16. 06:12
뜨거운 편지/ 김현태 그대에게 편지를 씁니다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그대 마음 얻을까, 고민하다가 연습장 한 권을 다 써버렸습니다 이렇게 침이 마르도록 고된 작업은 처음입니다 내 크나큰 사랑을 표현하기에는 글이란 것이 턱없이 못 미치는 것 같습니다 지금 부엌에서 보리차가 끓고 있습니다 보리차가 주전자 뚜껑을 들었다, 놨다 합니다 문틈으로 들어 온 보리차 냄새가 편지지 위에서 만년필을 흔들어 댑니다 사랑합니다, 란 글자 결국 이 한 글자 쓰려고 보리차는 뜨거움을 참았나 봅니다 그대와 나의 관계는 내 삶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 칼린 지브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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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 정 희삶 2019. 12. 12. 13:47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 정 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은 손 하나 오고 있거니 … 제4시집 《이 시대의 아벨》(문학과 지성사, 1983) 기적이 일어나라 간절한 나의 마음이 담긴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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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 박성철삶 2019. 1. 8. 11:16
고백 / 박성철 1 그대를 알고부터 사랑하는 일만이 사랑의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넘쳐나게 담아도 또 빈자리가 남을 수밖에 없는 큰 그릇이었습니다. 사랑은....... 눈물이 마를 그날까지 내 전부를 내주고도 허물어지지 않을거라 믿었던 그대에게 이제야 부끄러움을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일만이 내 사랑의 전부가 아니었음을 사랑 받고픈 욕망 또한 내 사랑의 절반이었음을..... 2 그대를 좋아합니다. 그대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그대를 사랑합니다. 그토록 그대를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3 그대가 알고 계신 수많은 사람중에 내가 이 땅에 발딛고 하루를 살아가고 있음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수많은 숨결중에 하나의 호흡으로 내가 숨쉬고 있음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대를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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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한다는 것 / 류근삶 2018. 2. 15. 14:03
최선을 다한다는 것 / 류근 대부분의 파도는 육지에 닿기 전에 몸을 잃는다 살아서 오는 파도보다 푸른 해면에 제 흔적을 놓쳐버린 채 죽어버리는 파도가 더 많다 몸을 데리고 육지에 오르는 파도는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의 자세를 잘 익혔다 나는 그것에 대해 일찍이 들어본 바가 없었으나 몸을 잃고 돌아서면서 파도는 내게 삼진 아웃 당하고 돌아서는 타자처럼 말했다 나는 여기서 멈추기 위해 달의 힘까지 빌려 몸을 일으켰으나 육지에 몸을 더럽히지 않은 것으로 나의 길을 잘 마쳤다! 파도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파도의 굳은살이 조금 보이는 것 같았다 바람 불고 파도치던 날 바라보는 바다도 사나웠다 차가움이, 마음을 평온하게 이끌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