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풍경
-
11월의 낙엽... 최영미삶 2019. 11. 8. 19:05
11월의 낙엽... 최영미 가을비에 젖은 아스팔트. 돌아보면, 떨어질 잎이 하나 남아 있었나. 천둥에 떨고 번개에 갈라진 잎사귀. 심심한 아이들에게는 장난감이 되어주고 종이보다 가벼운 몸으로 더러운 뒷골목을 지키던 너. 허술한 나뭇가지에 목숨을 부지하고 식물의 운명에 순종했던, 상처투성이의 몸에 햇살이 닿으면 촘촘한 세월의 무늬가 드러나지만, 이대로 흔들린다 누군가의 가슴바닥에 훅, 떨어졌으면…… 첫눈이 내려 무거운 눈을 매달고 허공에서 부서지기 전에, 순한 흙에 덮여 잠들었으면…… 낙엽의 비문(碑文)을 읽을 그대는 지금 어디 있는가. -시집 『도착하지 않은 삶』(문학동네, 2009) 큰 사랑을 주신 당신께 감사의 말을 전하지 못하였습니다 가을,,,!
-
가을 들판에서삶 2019. 10. 15. 20:40
가을 들판에서 /김점희 가을볕이 좋아 바람 따라 길을 나선다. 초록의 싱싱함만 있어도 좋을 들녘은 잘 익은 가을 내음과 어여쁜 들꽃향기, 또르르또르르 우는 풀벌레 소리가 있어 더욱 정겹다. 중년의 멋스러움으로 익어 가는 벼이삭들은 여유롭고 멋쟁이 백로의 우아한 몸짓에 가을은 한층 아름답다. 오솔길 걷다 투두둑 떨어진 밤송이, 토실토실 알밤 하나 꺼내어 오도독 깨물며 가을을 맛본다. 이 나무 저 나무 떼지어 노닐며 노래하는 참새들의 오페라는 무료공연이요, 넓고 높게 펼쳐진 푸른 하늘 뭉실뭉실 피어나는 하이얀 구름무대는 눈부시게 화려하고, 온 산에 단풍교향곡 울려 퍼지면 벅찬 이 감동 어찌 누를까. 그 날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호흡이 가빠온다 매년 가을이면 가는 곳, 황금빛 논과 갈대가 핀 농로가 아름답다 오..
-
가을의 기도/이 해인 수녀삶 2019. 9. 10. 20:56
가을의 기도/이 해인 수녀 가을이여 어서 오세요 가을 가을 하고 부르는 동안 나는 금방 흰 구름을 닮은 가을의 시인이 되어 기도의 말을 마음속에 적어봅니다 가을엔 나의 손길이 보이지 않는 바람을 잡아 그리움의 기도로 키우며 노래하길 원합니다 하루하루를 늘 기도로 시작하고 세상 만물을 위해 기도를 멈추지 않는 기도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가을엔 나의 발길이 산길을 걷는 수행자처럼 좀 더 성실하고 부지런해지길 원합니다 선과 진리의 길을 찾아 끝까지 인내하며 걸어가는 가을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가을엔 나의 언어가 깊은 샘에서 길어 올린 물처럼 맑고 담백하고 겸손하길 원합니다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맑고 고운 말씨로 기쁨 전하는 가을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2017년 가을 백양사의 추억입니다 이 세상에서..
-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산 2017. 10. 10. 22:12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에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
-
가을에는/최영미산 2017. 8. 29. 18:18
가을에는/최영미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 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수수) (부추꽃)
-
가을 풍경과 시삶 2016. 11. 28. 09:46
가을사랑 너를 그리며 / 도종환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나의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 부는 저녁 숲 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 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 아침을 생각하며 지울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