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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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사랑 / 박노해삶 2023. 12. 16. 17:04
겨울 사랑 / 박노해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에게 겨울이 없다면 무엇으로 따뜻한 포옹이 가능하겠느냐 무엇으로 우리 서로 깊어질 수 있겠느냐 이 추운 떨림이 없다면 꽃은 무엇으로 피어나고 무슨 기운으로 향기를 낼 수 있겠느냐 나 언 눈 뜨고 그대를 기다릴 수 있겠느냐 눈보라 치는 겨울밤이 없다면 추워 떠는 자의 시린 마음을 무엇으로 헤아리고 내 언 몸을 녹이는 몇 평의 따뜻한 방을 고마워하고 자기를 벗어버린 희망 하나 커 나올 수 있겠느냐 아아 겨울이 온다 추운 겨울이 온다 떨리는 겨울 사랑이 온다 바다는 자신을 그대로 내보인다 우리의 인생도 똑같다 필요 이상으로 숨길 필요도, 꾸밀 필요도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 나 자신을 보이며 나아가면 된다 ---- 이주영, 모든 삶은 흐른다 중에서 --- 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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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수, 한계령에서1삶 2023. 1. 18. 21:24
온종일 서북주릉(西北紬綾)을 헤매며 걸어왔다. 안개구름에 길을 잃고 안개구름에 흠씬 젖어 오늘, 하루가 아니라 내 일생 고스란히 천지창조 전의 혼돈 혼돈 중에 헤매일지. 삼만육천오백 날을 딛고 완숙한 늙음을 맞이하였을 때 절망과 체념 사이에 희망이 존재한다면 담배 연기빛 푸른 별은 돋을까. 저 산은, 추억이 아파 우는 내게 울지 마라 울지 마라 하고 발아래 상처 아린 옛 이야기로 눈물 젖은 계곡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구름인 양 떠도는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홀로 늙으시는 아버지 지친 한숨 빗물 되어 빈 가슴을 쓸어 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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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暴雪) / 오탁번산 2022. 12. 23. 22:10
폭설(暴雪) / 오탁번 삼동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 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가 흰눈으로 뒤덮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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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폭포 / 이산하삶 2022. 2. 14. 19:33
겨울 폭포 / 이산하 나이에 맞게 살 수 없다거나 시대와 불화를 일으킬 때마다 난 얼어붙은 겨울 폭포를 찾는다 한때 안팍의 경계를 지웠던 이 폭포는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여전히 공포에 떨고 있다 자신의 모든 틈을 완벽하게 폐쇄시켜 폭포 바닥에 깔린 돌들의 외침이며 사방으로 튀어나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물방울들의 그림자며 지금도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저 헛것들의 슬픔까지 폭포는 물의 마디마디 꺾어가며 자신을 허공으로 던진다 그러나 던져지면서도 폭포는 왜 정점에서 자신을 꺾는지 자신을 꺾어 왜 단숨에 비약하는지 물이 바닥을 치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내 눈과 내 귀의 모호한 결탁임을 그것이 마침내 공포에 떠는 내 헛것의 정체임을 불현듯 깨닫는다 폭포는 물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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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이라는 것에 대하여 / 김현태산 2022. 2. 6. 19:47
인연이라는 것에 대하여 / 김현태 누군가가 그랬습니다 인연이란 잠자리 날개가 바위에 스쳐, 그 바위가 눈꽃처럼 하이얀 가루가 될 즈음, 그때서야 한 번 찾아오는 것이라고 그것이 인연이라고 누군가가 그랬습니다 등나무 그늘에 누워 같은 하루를 바라보는 저 연인에게도 분명, 우리가 다 알지 못할 눈물겨운 기다림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겨울 꽃보다 더 아름답고, 사람 안에 또 한 사람을 잉태할 수 있게 함이 그것이 사람의 인연이라고 누군가가 그랬습니다 나무와 구름 사이 바다와 섬 사이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수 천, 수 만 번의 애닯고 쓰라린 잠자리 날개 짓이 숨쉬고 있음을 누군가가 그랬습니다 인연은, 서리 처럼 겨울 담장을 조용히 넘어오기에 한 겨울에도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아야 한다고 누군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