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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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그렇지 않다 / 김광규삶 2020. 12. 2. 21:27
아니다 그렇지 않다 / 김광규 굳어 버린 껍질을 뚫고 따끔따끔 나뭇잎들 돋아나고 진달래꽃 피어나는 아픔 성난 함성이 되어 땅을 흔들던 날 앞장서서 달려가던 그는 적선동에서 쓰러졌다 도시락과 사전이 불룩한 책가방을 옆에 낀 채 그 환한 웃음과 싱그러운 몸짓 빼앗기고 아스팔트에 쓰러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스무 살의 젊은 나이로 그는 헛되이 사라지고 말았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물러가라 외치던 그날부터 그는 영원히 젊은 사자가 되어 본관 앞 잔디밭에서 사납게 울부짖고 분수가 되어 하늘 높이 솟아오른다 살아남은 동기생들이 멋쩍게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갔다 와서 결혼하고 자식 낳고 어느새 중년의 월급쟁이가 된 오늘도 그는 늙지 않는 대학 초년생으로 남아 부지런히 강의를 듣고 진지한 토론에 열중하고 날렵하게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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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年(중년) / 김광규삶 2020. 11. 30. 21:17
中 年(중년) / 김광규 낯선 도시에서 술 취한 저녁 부동산 업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쫓아오며 경적을 울렸다 나는 모른 척 걸어갔다 주유소 앞을 지나 비탈길을 자갈이 깔린 비탈길을 비틀대며 걸었던 것이다 어두운 피해 어느 사진관 입구 불빛 앞에 섰을 때 나는 안으로 들어갈 마지막 기회를 잃었다 그리하여 밤새도록 술 마시고 웩웩 토하고 해장국집을 나섰을 때 밤을 새운 가로등은 피곤해 보였고 부지런한 행인들은 더욱 낯설었다 냉수를 마시고 손을 씻고 어딘가 여름 풀밭에 누워 나도 여유 있는 웃음을 웃고 싶었다 이제 달력이 한 장 남았습니다 2020년 모두가 힘든 해였습니다 그래도 꽃이 지면 까만 씨앗이 남듯이 삶은 더욱 단단해졌을 듯,,,, 12월 멋진 꿈 마무리 하시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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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12 / 김광규삶 2020. 11. 28. 23:23
그림자 12 / 김광규 굴곡진 생의 뒤안길 물끄러미 바라보네 그림자는 그림자가 아니라 그 이름이 그림자일 뿐 마음 비우면 저렇게 가볍게 몸 깎으면 저토록 얇게 될 수도 있네 껍질을 벗긴 과일처럼 화장을 지운 여인처럼 내면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화려를 버려 더욱 빛나는 들꽃이든 나를 잃고 나를 알아 그림자로 살아가네 ㅡ출처 :시집 『그림자』(도서출판 답게, 2020) 조금은 지난 가을 사집입니다 용비지에서 즐거웠던 추억이기도 하구요 미루다 이제서 몇 장 창고에서 꺼내봅니다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나대로 살고 싶다, 어릴적 꿈이 였는데,,,, 삶도, 자연도, 시간도,,,, 지나간 자리엔 흔적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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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물음 / 김광규삶 2018. 12. 9. 21:24
오래된 물음 / 김광규 누가 그것을 모르랴 시간이 흐르면 꽃은 시들고 나뭇잎은 떨어지고 짐승처럼 늙어서 우리도 언젠가 죽는다 땅으로 돌아가고 하늘로 사라진다 그래도 살아갈수록 변함없는 세상은 오래된 물음으로 우리의 졸음을 깨우는구나 보아라 새롭고 놀랍고 아름답지 않느냐 쓰레기터의 라일락이 해마다 골목길 가득히 뿜어내는 깊은 향기 볼품 없는 밤송이 선인장이 깨어진 화분 한 귀퉁이에서 오랜 밤을 뒤척이다가 피워낸 밝은 꽃 한 송이 연못 속 시커먼 진흙에서 솟아오른 연꽃의 환한 모습 그리고 인간의 어두운 자궁에서 태어난 아기의 고운 미소는 우리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지 않느냐 맨발로 땅을 디딜까봐 우리는 아기들에게 억지로 신발을 신기고 손에 흙이 묻으면 더럽다고 털어준다 도대체 땅에 뿌리박지 않고 흙도 몸에 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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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 덕숭산 첫눈 산행!산 2016. 12. 25. 19:43
묘비명 / 김광규 한 줄의 시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 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이른 아침이라 산님들이 적습니다 호젓한 산행이 주는 만족감을 기대해 봅니다 세명이서 선미술관에 들릅니다 이응노 화백, 원담스님 등의 작품을 둘러 봅니다 요즘의 번잡함을 보면, 역사는 수 많은 사람들의 삶을 통하여 살아가가는 한계 극복의 기록인데 그 삶의 분량이 많건, 적건, 아니면 비중이 있건 없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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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희미해진 옛사랑의 그림자/ 최영미삶 2016. 6. 10. 05:50
봄, 젊음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치열하고, 감내하기 어렵다는 것이 아닐까? 그 봄을 추억해 봅니다 또 다시 희미해진 옛사랑의 그림자/ 최영미 불꺼진 방마다 머뭇거리며, 거울은 주름살 새로 만들고 멀리 있어도 비릿한, 냄새를 맡는다 기지개 켜는 정충들 발아하는 새싹의 비명 무덤가의 흙들도 어깨 들썩이고 춤추며 절뚝거리며 4월은 깨어난다 더러워도 물이라고, 한강은 아침해 맞받아 반짝이고 요한 슈트라우스 왈츠가 짧게 울려퍼진 다음 9시 뉴스에선 넥타이를 맨 신사들이 침통한 얼굴로 귀엣말을 나누고 청년들은 하나 둘 머리띠를 묶는다 그때였지 저 혼자 돌아다니다 지친 바람 하나 만나는 가슴마다 들쑤시며 거리는 초저녁부터 술렁였지 발기한 눈알들로 술집은 거품 일듯 부글부글 취기가 욕망으로 발효하는 시간 밤공기 더 축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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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 앞-김광규 -산 2015. 12. 14. 11:12
용봉산에 올라서 호젓한 곳에 자리잡았습니다 산님들이 엄청 많습니다 여러가지 색갈로 차려입은 것이 산을 물들입니다 올라온 길, 사람들, 산 아래 펼쳐진 들녁,,,, 가을이 떠난 언저리의 허전한 느낌,,, 이 순간, 자연 한가운데서 저의 존재감을 느끼고 싶습니다 일주문 앞 -김광규 시인 - 갈잎나무 이파리 다 떨어진 절길 일주문 앞 비닐 천막을 친 노점에서 젊은 스님이 꼬치 오뎅을 사 먹는다 귀영하는 사병처럼 서둘러 국물까지 후루룩 마신다 산 속에는 추위가 빨리 온다 겨울이 두렵지는 않지만 튼튼하고 힘이 있어야 참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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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삶 2015. 8. 12. 06:54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4 · 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는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