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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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의 가을 / 최영미삶 2017. 8. 28. 22:44
내 속의 가을 / 최영미 바람이 불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높고 푸른 하늘이 없어도 뒹구는 낙엽이 없어도 지하철 플랫폼에 앉으면 시속 100킬로로 달려드는 시멘트 바람에 기억의 초상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흩어지는 창가에 서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따뜻한 커피가 없어도 녹아드는 선율이 없어도 바람이 불면 오월의 풍성한 잎들 사이로 수많은 내가 보이고 거쳐온 방마다 구석구석 반짝이는 먼지도 보이고 어쩌다 네가 비치면 그림자 밟아가며, 가을이다 담배연기도 뻣뻣한 그리움 지우지 못해 알미늄 샷시에 잘려진 풍경 한 컷, 우수수 네가 없으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팔장을 끼고 가 ㅡ 을 오늘, 비가 내립니다 저의 집 화단에는 아직도 노오란 장미가 있습니다 가을은 삶으로의 새로운 복귀입니다 경계를 넘어서는 날, 칠월칠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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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길에 앉아 / 정호승삶 2014. 9. 30. 21:36
철길에 앉아 / 정호승 철길에 앉아 그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철길에 앉아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때 멀리 기차 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기차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코스모스가 안타까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기차가 눈 안에 들어왔다 지평선을 뚫고 성난 멧돼지처럼 씩씩거리며 기차는 곧 나를 덮칠 것 같았다 나는 일어나지 않았다 낮달이 놀란 얼굴을 하고 해바라기가 고개를 흔들며 빨리 일어나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 싶었다 아파트 화단의 가을 장미입니다 비가 내리니 더욱 예쁘고, 안쓰럽습니다 제가 겨울까지 보는 장미입니다 2014년 9월의 마지막 저녁입니다 책상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돌아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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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생일음식 2012. 11. 8. 20:23
세상에 태어난 생명은 어떤 것이든 축하받아야 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내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저녁!! 사랑으로 축복하게 하소서 가을! 빨갛게 빨갛게 핀 얼굴이 그리움인양 나를 부릅니다 마음으로 축하합니다 준비된 꽃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소서 따스한 밥 한술이 목젖을 넘으며 행복합니다 밥상에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의 바다에서 태어난 모습으로 살게 하소서 갈수록 살수록 사무치는 당신의 사랑 앞에 겸손하게 하소서 그리고 당신의 사랑 속에 새로 태어난 별들이고 싶습니다 나를 불러 준 이 땅에서 뜨겁게 살고 싶습니다 길이 되게 하시고, 나를 희망으로 나누게 하소서 뜨거운 여름에도, 천둥치는 밤에도 언제나 가을을 기다리며 인내하게 하소서 어떤 이는 추위와 싸우는 밤! 따스하고 넘치는 음식 앞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