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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을 바람
    2017. 8. 27. 16:29

    가을바람 / 최영미

    가을바람은 그냥 스쳐가지 않는다
    밤별들을 못 견디게 빛나게 하고
    가난한 연인들 발걸음을 재촉하더니
    헤매는 거리의 비명과 한숨을 몰고 와
    어느 썰렁한 자취방에 슬며시 내려앉는다
    그리고 생각나게 한다
    지난 여름을, 덧없이 보낸 밤들을
    못 한 말들과 망설였던 이유들을
    성은 없고 이름만 남은 사람들을.....
    낡은 앨범 먼지를 헤치고 까마득한 사연들이 튀어나온다

    가을바람 소리는 속절없는 세월에 감금된 이의
    벗이 되었다 연인이 되었다
    안주가 되었다

    가을바람은 재난이다 

              

     

    가을에는 / 최영미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어느새 / 최영미

    사랑이 어떻게 오는지
    나는 잊었다

    노동과 휴식을 바느질하듯 촘촘히 이어붙인 24시간을
    내게 남겨진 하루하루를 건조한 직설법으로 살며
    꿈꾸는 자의 은유를 사치라 여겼다.
    고목에 매달린 늙은 매미의 마지막 울음도
    생활에 바쁜 귀는 쓸어담지 못했다 여름이 가도록
    무심코 눈에 밟힌 신록이 얼마나 청청한지,
    눈을 뜨고도 나는 보지 못했다.
    유리병 안에서 허망하게 시드는 꽃들을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의식주에 충실한 짐승으로
    노래를 잊고 낭만을 지우고
    심심한 밤에도 일기를 쓰지 않았다

    어느 날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나
    비스듬히 쳐다볼 때까지

     

     

    강릉 부채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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