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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월에 읽어보는 시
    2016. 2. 29. 22:54

     봄비 / 고정희


    가슴 밑으로 흘러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 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오 그리운 이여

    저 비 그치고 보름달 떠오르면

    우리들 가슴속의 수문을 열자

    봄비 찰랑대는 수문을 열자

    봄비 찰랑대는 수문을 쏴 열고

    꿈꾸는 들판으로 달려나가자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리

    다만 둥그런 수평선 위에서

    일월성신 숨결 같은 빛으로 떠오르자 

     

    처음 만나던 때 / 김광규 

      

    조금만 가까워져도 우리는

    서로 말을 놓자고 합니다

    멈칫거릴 사이도 없이

    너는 그 점이 틀렸단 말이야

    야 돈 좀 꿔다우

    개새끼 뒈지고 싶어

    말이 거칠어질수록 우리는

    친밀하게 느끼고 마침내

    멱살을 잡고

    싸우고

    죽이기도 합니다

    처음 만나 악수를 하고

    경어로 인사를 나누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앞으로만 달려가면서

    뒤돌아볼 줄 모른다면

    구태여 인간일 필요가 없습니다

    먹이를 향하여 시속 140km로 내닫는

    표범이 훨씬 빠릅니다

    서먹서먹하게 다가가

    경어로 말을 걸었던 때로

    처음 만나던 때로

    가끔씩 되돌아가야 합니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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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끝나는 곳에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