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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봉산 암릉 진달래와 고은 시모음(초댓장 드립니다)
    2015. 4. 29. 15:10

     

    봄     비 /  고은

     

    이 밤중에 오시나부다.
    오시는 듯.
    아니 오시는 듯
    오시나부다.

     

    어느 아기의 귀가
    이 봄비 오시는 소리 들으시나부다.

     

    봄비에 젖어든 땅
    그땅 속
    잠든 일개미들이 자다 깨어
    어수선하시나부다.


    이제 막 깬 알에서 나온 일개미 깨어나
    이 세상이
    무서운 줄을 처음으로 아시나부다.

     

    봄비 이 밤중에 오시나부다.
    오로지 내 무능의 고요 죄스러워라

     

     

     

    긴 겨울에 이어지는 봄이 우리인 것을 - 고은-

    우리나라 사람 여싯여싯 질겨서
    지난 겨울 큰 추위에도 얼어죽지 않고 무사히 보냈습니다
    그러나 삼한사온 없어진 그런 겨울 백 번만 살면
    너도 나도 겨울처럼 산처럼 깊어지겠습니다
    추위로 사람이 얼어죽기도 하지만 사람이 추위에 깊어집니다
    우리나라 사람 좀더 깊어야 합니다
    드디어 묘향산만큼 깊어야 합니다
    장마 고생이 가뭄만 못하고
    가난에는 겨울이 여름만 못한 것이 우리네 살림입니다
    이 세상 한번도 속여본 적 없는 사람은 이미 깊은 사람입니다
    그런 순량한 농부 하나 둘이
    긴 겨울 지국총 소리 하나 없이 살다가
    눈더미에 묻힌 마을에서 껌벅껌벅 눈뜨고 있습니다
    깊은 사람은 하늘에 있지 않고 우리 농부입니다
    아무리 이 나라 불난 집 도둑 잘되고
    그 집 앞 버드나무 잘 자라도
    남의 공적 가로채는 자 많을지라도
    긴 겨울을 견디며 그 하루하루로 깊어서 봄이 옵니다
    봄은 이윽고 긴 겨울에 이어지는 골짜기마다 우리의 것을
    누가 모르랴 동네 어른이며 날짐승이며
    봄이 왔다고 후닥닥 덕석 벗지 않는 외양깐 식구며
    나뭇가지마다 힘껏 눈이 트는 봄이
    이미 우리들의 얼굴에 오르는 환한 웃음입니다
    깊은 겨울을 보낸 깊은 충만으로
    우리들의 많은 할 일을 적실 빛나는 울음입니다

     

     

     

     

    다시 오늘 - 고은-

    어제를 반성하기보다
    오늘을 반성해야 할 때가 있다
    어제는 죽음일 따름
    아 짐승들은 자유롭구나
    반성 없는 그들의 하루하루와 함께
    우리는
    오늘을 반성해야 할 때가 있다

    오늘 나는 무엇인가
    나는 짐승보다도 못하구나
    반성이 없는 것과
    반성이 있는 것 사이
    그 질곡의 배회에 맴도는
    나는 무엇인가

    벌써 아침해의 찬란한 빛은 낡아
    얼어붙은 것을 다 녹이지 못하고
    다시 얼기 시작하는 저녁이
    저쪽에서 다가온다

    그러나 나는 이런 오늘을 때려 죽이리라
    나는 무엇인가
    내가 몽둥이이기 전에
    내가 벼락이기 전에
    내일을 잉태한 몸으로
    꽝 꽝 언 땅을 걸어간다
    찬 별빛이 나로 하여금 반짝반짝 빛난다

    아 그동안 오늘이 너무 컸다

     

     

     

     

    길  / 고은

     

    길이 없다!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숨막히며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간다
    여기서부터 역사이다
    역사란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부터
    미래의 험악으로부터
    내가 가는 현재 전체와
    그 뒤의 미지까지
    그 뒤의 어둠까지이다
    어둠이란
    빛의 결핍일 뿐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길이 없다
    그리하여
    길을 만들며 간다
    길이 있다
    길이 있다
    수많은 내일이
    완벽하게 오고 있는 길이 있다

     

     

     

     

     

    나는 몰라요 / 고은

    나는 몰라요
    나는 몰라요
    아무것도 모르고서
    오로지 당신뿐

    오늘 깨달아 아프기를
    이 무지몽매
    이것으로 하늘이 저리 푸르른가
    드높이 솔개 멈춰

     

     

     

     

     

     

    들꽃 / 고은


    들에 가 들꽃 보면 영락없지요

    우리 겨레 은은한 품성 영락없지요

    들꽃 몇천 가지 다 은은히 단색이지요

    망초꽃 이 세상꽃

    이것으로 한반도 꾸며놓고 살고지고요

    금낭초 앵초꽃

    해 질 무렵 원추리꽃

    산들바람 가을에는 구절초 피지요

    저 멀리 들국화 피어나지요

    이런 꽃 피고지고 복이지요

    이런 꽃 피고지고 우리 겨레 복이지요

    들에 나가 들꽃 보면 영락없지요

     

     

     

    귀성(歸省) / 고은


    고향길이야 순하디 순하게 굽어서

    누가 그냥 끌러둔 말없는 광목띠와도 같지요

    산천초목을 마구 뚫고 난 사차선 저쪽으로

    요샛사람 지방도로 느린 버스로 가며 철들고

    고속도로 달리며 저마다 급한 사람 되지요

    고향길이야 이곳저곳 지나는 데마다 정들어

    또 더러는 빈 논 한 배미에 밀리기도 하고

    또 더러는 파릇파릇 겨울 배추 밭두렁을 비껴서

    서로 오손도손 나눠 먹고 사양하기도 하며 굽이치지요

    삼천리 강산 고생보다는 너무 작은 땅에서

    오래도록 씨 뿌리고 거두는 대대의 겸허함이여

    자투리 땅 한 조각이라도 크나큰 나라로 삼아

    겨우 내 몸 하나 경운기길로 털털 감돌아 날 저물지요

    어느새 땅거미는 어둑어둑 널리는데

    이 나라에서 왜 내 고향만이 고향인가요

    재 넘어가는 길에는 실바람 어느 설움에도

    불현듯 어버이 계셔야 해요 그리운 내 동생들 달려오지요

     

     

    그꽃 / 고은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고은 시인의 바람의 사상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1973년부터 1977까지의 일기이다

    힘든 시국과 시련을 견디는 이야기들이었다

     

    이 봄도 가려나 보다

     

    용봉산 암릉에 진달래도 진다

    이번주 한 뿌리만 더 보면

    매년 보는 진달래는 거의 인사를 마쳤다

     

    행복한 금요일 되세요!

     

     

    댓글 7

길이 끝나는 곳에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