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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희미해진 옛사랑의 그림자/ 최영미삶 2016. 6. 10. 05:50
봄, 젊음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치열하고, 감내하기 어렵다는 것이 아닐까?
그 봄을 추억해 봅니다
또 다시 희미해진 옛사랑의 그림자/ 최영미
불꺼진 방마다 머뭇거리며, 거울은 주름살 새로 만들고
멀리 있어도 비릿한, 냄새를 맡는다
기지개 켜는 정충들 발아하는 새싹의 비명
무덤가의 흙들도 어깨 들썩이고
춤추며 절뚝거리며 4월은 깨어난다
더러워도 물이라고, 한강은 아침해 맞받아 반짝이고
요한 슈트라우스 왈츠가 짧게 울려퍼진 다음
9시 뉴스에선 넥타이를 맨 신사들이 침통한 얼굴로
귀엣말을 나누고
청년들은 하나 둘 머리띠를 묶는다
그때였지
저 혼자 돌아다니다 지친 바람 하나
만나는 가슴마다 들쑤시며 거리는 초저녁부터 술렁였지
발기한 눈알들로 술집은 거품 일듯
부글부글 취기가 욕망으로 발효하는 시간
밤공기 더 축축해졌지
너도 나도 건배다!
딱 한잔만
그러나 아무도 끝까지 듣지 않는 노래는 겁없이 쌓이고
화장실 갔다 올 때마다 허리띠 새로 고쳐맸건만
그럴듯한 음모 하나 못 꾸민 채 낙태된 우리들의
사랑과 분노, 어디 버릴 데 없어
부추기며 삭이며 서로의 중년을 염탐하던 밤
새벽이 오기 전에 술꾼들은 제각기 무릎을 세워 일어났다
택시이! 부르는 손들만 하얗게, 텅 빈 거리를 지키던 밤
4월은 비틀거리며 우리 곁을 스쳐갔다
해마다 맞는 봄이건만 언제나 새로운 건
그래도 벗이여, 추억이라는 건가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는 차가운 방에 앉아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 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 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고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신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 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 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 비 내리던 용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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