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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남 홍성 이응노화백 생가지를 돌아보며,,,,
    2016. 7. 4. 23:23

    【 인생은 새로운 길을 만드는 사람과 만들어진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

    있다. 나는 새로운 길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 -- 안미쁜아기 글 중에서 】

    이응노화백 미술관 전경입니다

    생가지 앞에 조성된 연꽃농원입니다

     

    비 내리는 날이어서 한적하고 운치도 있습니다

     

     

    몇 일전에 지나면서 연꽃이 핀듯 하더니 벌써 많이 피고 또 졌습니다

     

     

     

     

     

     

     

     

    꿈은 사람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

    꿈이 꿈을 이루어간다는 것을 알았다

    꿈을 꾸어야 하는 이유다.

     

    -- 안미쁜아기의 글 주에서 --

     

     

    고 이응노 화백 생가지

    부속건물

                          미술관 입구입니다  내부 작품은 눈으로만,,,,

     

     

    고암 이응노

     

    1904∼1989

    '서예적 추상' 이라는 독창적인 세계를 창조했던 화가.

    1904년 충남 홍성 출신.

    해강 김규진( )에게 서화를 배웠으며,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청죽’으로 입선하며 화단에 나왔다.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남화() 2대가 중 한명인 마쓰바야시 게이게쓰에게 사사받았고 혼고()연구소 등에서 서양화를 연구하는 등 근대적인 미술교육을 받았다.

    1945년 해방을 맞은 고암은 김영기,장우성 등과 함께 ‘단구()미술원’을 조직해 식민잔재에서 벗어나 새로운 한국회화를 개척하기 위해 노력했다.

    1958년 프랑스 평론가 자크 라센의 초청으로 파리로 건너갔고, 이듬해 독일에서 순회전을 가진 뒤 1960년 파리에 정착했으며 앵포르멜 운동을 주도한 파케티화랑과 전속계약을 맺어 1961년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63년 살롱도톤전에 출품하면서 유럽 화단에 알려지게 되고, 1968년 제8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전에서 명예대상을 획득하여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1960년 파리에 정착한 고암은 가난에 쪼들려 물감 구입비 조차 없어 컬러 잡지를 찢어 붙여 콜라주 작품을 만드는데 몰두했다. 당시 파리 화단에서는 벽지 신문지 헝겊 등을 화면에 붙이는 콜라주 작업을 많이 하긴 했으나 고암은 이들과 달랐다. 그는 종이를 찢고 자르고 구겨서 붙일 뿐 아니라 그 위에 다시 수묵이나 담채로 다양한 마티에르를 표현, 종이조각과 화면의 조화를 추구하는 새로운 콜라주를 선보였던 것.

    고암은 서양미술의 본고장에서 한지와 수묵이라는 동양화 매체를 사용해 스스로 '서예적 추상' 이라고 이름붙인 독창적인 세계를 창조했다. 이미지는 고대 상형문자를 연상시키지만 한편으로는 풍경이나 동물, 사람으로 읽히기도 한다. 자연과 인간의 움직임을 흔적으로 기록한 일종의 문자로도 볼 수 있는 서예추상은 70년대 문자추상과 80년대의 군상 연작으로 발전해나갔다.

    고암은 '동백림사건'(1967년)으로 옥고를 치른 데 이어 백건우·윤정희 부부 납치미수사건(1977년)에 연루되는 등 시련을 겪었다. 1969년 사면되었으나 77년 서울 문헌화랑의 ‘무화()전’을 끝으로 작고할 때까지 국내활동을 하지 못했다.

    1989년 꿈에 그리던 고국에서의 초대전(호암갤러리)을 앞두고 파리에서 급서, 예술의 대가들이 묻힌 파리시립 펠 라세즈 묘지에 안장됐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암 이응노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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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끝나는 곳에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